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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극장의 관객 2(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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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erdix 작성일22-11-27 16:06 조회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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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는 민주주의는 인류의 발전을 저해하는 체제이며 사회의 약자는 강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전쟁을 찬양하고 어리석은 평화를 조롱하며 악인이 선인보다 가치 있다고 한다. 양심의 가책은 삶의 궁지에 몰린 인간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만들어낸 마음의 방벽일 뿐이라며 연민은 약자의 도태를 저지하므로 진화에 방해된다고 한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그의 과도한 자기찬양이다. 그의 마지막 저서 이사람을 보라의 소제목은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가등이다. 한 구절만 뽑아보자.

 

나는 어떤 새도 이르러보지 못한 높은 데서 왔고, 어떤 발도 길을 잃어보지 못한 심연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게 내 책 중 어느 하나를 잡으면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고, 내가 밤의 휴식마저 설치게 한다고 말했다. 내 책보다 더 긍지에 차 있으면서 동시에 더 세련된 종류의 책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 내 책들은 가장 부드러운 손가락에 의해, 그리고 가장 용감한 주먹에 의해 정복되어야 한다. 영혼의 온갖 허약함은 관여하지 못하며, 온갖 소화 불량증마저도 영원히 배제된다. 이 사람을 보라에서

 

  대체 이런 자기과시는 어디서 나오는가. 자가당착에 가까울 정도의 자신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위대한 사상가라면 사상에 앞서 먼저 인간적 겸손을 요구하는 것이 보편의 윤리이다. 너무 고고해서 가늠하기 어려운 자인가 아니면 미친 자인가. 요즘의 상식과 정서와 거리가 먼 니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저명한 철학자니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뭔가가 있을 거야, 라며 받아들이고 복종해야 하는가.

이처럼 니체의 글 앞에서 머쓱하고 당황스러울 때 다행히도 우리 곁엔 고명섭이 있다.

 

그토록 위험한 텍스트가 왜 그토록 매혹적인 텍스트가 되는가? 그 위태로운 발언들이 그려내는 이미지들이 우리 내부의 어떤 원시적 영역에까지 파고들어 거의 야성적인 힘을 깨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길들여진 무기력증을 깨뜨려 내면 저 깊은 곳의 생명력을 들쑤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생명력, 그 야성적인 힘을 제어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 된다. 그것을 제어하지 못할 때 니체의 텍스트는 파괴의 교과서가 된다. 누가 읽느냐,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니체의 텍스트는 말 그대로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한다. 니체 말대로 선과 악은 거의 한몸처럼 뒤엉켜 있다. 악과 뒤섞인 초인, 그 초인은 결코 선한 인간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차라리 그것은 악마의 모습에 가깝다. -p.401     강조는 글쓴이

 

니체가 말하는 강자를 정치적 차원, 권력적 차원을 배제한 정신적 차원의 강자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니체의 사상을 반쪽만 본 것이거나 진실을 외면한 것이다. 강자나 귀족을 정신적 차원에서만 이해한다면, 그래서 민주주의에 반대하고 여성 해방에 반대하고 지배와 승리를 구가하는 압제적인 강자를 지워버린다면, 그리하여 강자의 본모습을 모호한 감상주의의 안개 속으로 밀어 넣는다면, 그것은 니체의 한쪽 측면을 전체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니체를 왜곡하는 일이 되고 만다. 그렇게 압제적이고 폭력적인 강자를 지워버리고 남은 정신의 강자, 그것을 두고 부드러운 니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부드러운 니체는 니체의 본모습이 아니다. 니체라는 원액에 물을 타 희석시킨 니체, 마시기 좋은 니체일 뿐이다. 니체의 사상, 니체의 철학은 약이자 독이다. 니체는 원액 그대로 맛을 봐야 하며 할 수 있다면 원액 그대로 마셔야 한다. 반민주적이고 반시대적인 니체를 있는 그대로 읽고 느껴야 한다. 그 니체를 소화하면 약이 되고 소화하지 못하면 독이 된다. 니체라는 문제는 결국 체험의 문제다. 어떤 정신으로 체험하느냐에 따라 똑같은 니체가 좋은 니체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니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p.569

 

 

  니체 사상을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하자면 바로 너 자신이 되어 너 자신으로 살아라!”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압축이지만 니체 정신의 요체는 바로 이것이다. 도덕의 계보서문에서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 존재다라는 문장이 있다. 이 명제와 마주친 순간 니체가 휘두른 망치에 나의 두개골이 와삭 깨진 느낌이다. 니체는 우리가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이방인이 되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는 알 수 없는 힘(권력의지)에 의지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나아갈 뿐이라고 한다. , 이 도저함이란!

니체는 이천 년 동안 서구사회를 지배해온 그리스 사상의 이성적 규율을 망치로 깨뜨리고, 기독교의 억압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키고는 너 자신만의 세계를 생성하라’, ‘스스로 창조하라(광야에서) 외쳤다. 이 모토로 인해 한때 니체는 우리에게 생철학이라는 (다소 이상한) 용어로 나타나기도 했다. 니체는 말한다.

 

나를 믿어라! 존재를 최대한 풍요롭게 실현하고 최대한 만끽하기 위한 비결은 바로 이것이다. “위험하게 살아라!” 베수비오 화산의 비탈에 너의 도시를 세워라!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대양으로 너의 배를 띄워라! 너 자신에게 필적할 만한 자들과의 대립 속에서, 그리고 특히 너 자신과의 대립 속에서 살아라! 너 앎(인식)을 찾는 자여! 지배자나 소유자가 될 수 없다면, 약탈자, 정복자가 되어라. 겁 많은 사슴들처럼 숲속에 숨어서 살아가야 하는 지겨운 시대는 곧 지나갈 것이다!“ 즐거운 학문

 

  이 얼마나 멋진 비유이고 가슴 떨리는 선동인가.

 

  앞서 서두에서 고명섭의 글은 저널리스트와 아카데믹을 능숙하게 넘나든다고 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그의 멋진 표현이다. 그의 문장은 문학적 수사와 비유로 넘쳐난다.

 

니체가 이해에 처음 철학자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고는 해도 그 명성의 햇살은 그를 둘러싼 고독의 한기를 풀어주기에는 턱없이 미약했다. -p.737

 

  그의 풍부하고 매끄러운 비유는 제아무리 난해한 내용이라도 읽는 이로 하여금 아무런 저항 없이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은 사유의 깊이에 앞서 재능에 속한다. 시집까지 낸 시인으로서의 언어 감각이 건조한 산문에서까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니체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정작 니체의 말을 거의 인용하지 않고 고명섭의 관점에 의지했다. 가이드북을 보고 현장을 상상할 수 있지만 현장에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기만이다. 그래서 니체 저서의 직접적 인용을 자제했다. 설령 인용한들 그것은 고명섭이 추출한 텍스트를 재가공하는 것일 뿐이다. 원석을 나의 손으로 만지면서 다듬은 것이 아니라 일차 가공을 거친 재료에 장식을 더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럴 바에야 나는 고명섭의 작품 자체를 원석으로 삼은 것이다.

 

  니체에 대한 나의 직접적 느낌은 언젠가 있을 그의 텍스트에 관한 독법이 완성된 후에 제대로 하게 될 것이다. 니체 사상의 핵심인 권력의지와 영원회귀를 시중에 나와 있는 통조림으로 간편하게 섭취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직접 니체의 바다에 뛰어들어 개념을 낚아채고 졸가리로 훑어내고 알짬을 건져내 스스로 조리하는 장면을 그려본다.

 

  가이드북을 자꾸 들여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여행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니체는 심연 속의 괴물을 자꾸 들여다보면 자신도 그 괴물이 되어버린다고 했다. 니체 탐사 여행을 언젠가는, 이라는 말로 미루지만 그 언젠가는이 어느 날 눈앞에 나타나 이제 가시죠? 하며 길을 열어줄 것이다. 그때 나는 기꺼이 이 가이드북이 제시해 준 길을 따라 즐겁게 여행하리라. 어수선한 정신의 고삐를 다잡으며 말이다.

 

  니체를 만난 것만으로도 나는 이 가을에 수확이 없다고 할 순 없으리라. 팔백쪽의 벽돌책이 여덟장의 팸플릿처럼 순식간에 읽히는 건 또 무슨 조화란 말인가.

2022.10.25

 

 

글쓰기란에 분량 제한이 있는 모양이군요한번에 다 업로드 되지 않아 두 편으로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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