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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극장의 관객(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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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erdix 작성일22-11-27 15:49 조회348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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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극장의 관객이 되어

 

황 인 규

 

 

  니체Nietzsche는 유령이다. ’하나의 유령이 세상을 배회하고 있다는 어느 선언문의 첫 문장처럼 우리 세대에서 니체는 하나의 유령으로 존재했다. 세대 전체가 비약이라면 적어도 나에게만이라도. 유령은 입에서 입으로 떠돌지만 그 실체는 알 수 없다. 실체를 파악했다면 더 이상 유령이 아닐 것이다. 니체가 나에게 유령으로 다가온 것은 중학교 때였다.

 

  나의 누나는 도도했다. 명문여고라는 타이틀이 누나의 정신을 공중부양시킨 모양이었다. 중학교 때까지 잘 지내던 교회 남학생이 공고로 진학하자 누나는 그 형을 상대하지 않았다. 교회에서의 모임과 집안끼리의 친교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대면하게 되더라도 곁에서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쌀쌀맞게 대했다.

 

  형은 축구를 잘했다. 동네 축구시합에서 형은 일부러 나에게 공을 패스해주며 기회를 만들어주곤 했다. 그런 형을 나는 좋아했다. 누나가 고2 때 형이 우리집에 왔다. 형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뭔가를 전해주러 왔다고 한다. 그때 형의 손에 들려 있는 책이 니체였다. 정확히 니체의 저서였는지 아니면 니체에 관한 책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담비털을 붙인 것처럼 콧수염이 무성한 사람의 사진만은 눈에 쏙 들어와 나의 뇌 속에 자리잡았다. 볼 일을 마친 형은 나에게 오더니 책 사이에 끼어놓은 편지를 꺼내 누나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나는 편지를 누나 책상 위에 놓았다.

 

  편지의 결과는 알 수 없지만 니체는 남았다. 니체라는 존재가 내 인식의 자장 안으로 들어온 이후 갑자기 니체의 말이 주변에 떠돌았다. ‘니체가 말하기를’, ‘니체에 의하면’, 따위의 말이 내 귀에 들리는 것이었다. 니체의 가장 유명한 명제 신은 죽었다를 들었을 때 나는 신은 없다라고 하지 않고 왜 죽었다, 라고 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이후 살아가면서 니체의 말 혹은 니체에 관련된 언표는 종종 내 귀를 간지럽혔다. 교양서나 인문서의 어느 한 귀퉁이엔 니체의 잠언이나 그에 관한 담론이 어김없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언술뿐이었다. 유령은 가끔씩 나타나 가슴을 서늘하게 할 뿐 현실에 일일이 간섭하진 않았다.

 

 

  삼십대 중반 지적 욕구가 왕성할 즈음 니체의 책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집었다. 니체의 저서는 초기중기후기 등으로 나뉘는바 각각 세계관의 편차가 심해 체계적으로 접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순전히 제목만 보고 충동적으로 독서에 임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완독은 실패했다. 한창 사회생활에 바쁜 와중에 쉽게 읽히는 내용이 아니라서 중도에 책을 덮었다는 게 변명 아닌 변명이다.

당시 내가 내렸던 니체에 대한 평가는 엄밀한 인식론에 근거한 철학도 아니고 문학적 서정이 넘치는 산문도 아니라는 것이다. 통찰의 아포리즘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철학이라기엔 비논리적이고 문학이라기엔 지나치게 사유를 요구했다. 철학으로 접근했는데 문학적 진술이 넘치고, 문학으로 읽기엔 사상을 앞세우는 게 맘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니체를 떨쳤다. 그러나 니체는 떠난 게 아니었다. 세상을 진단하든, 사회를 탐구하든, 사람을 평가하든, 서적이나 칼럼이나 논문 등의 글에서 문득문득 나타나는 니체의 언명은 자주 나의 신경줄을 건드렸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는 니체를 섭렵해보자는 욕구가 점점 일었다. 이제 무턱대고 덤비기보다는 좀더 재보고 전략적으로 접근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보니 니체라는 숲은 거대해서 생각 없이 들어갔다가는 길을 잃기에 십상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이 가을에 니체에 관한 책 한 권을 펼쳤다. 나는 왜 니체를 만나러 갔는가, 그 이유를 대려면 삶에 대한 푸념을 먼저 늘어놓아야 하기에 그 추레함을 펼쳐놓을 용기는 없다.

 

  나는 왕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광활한 숲을 여행하기에 앞서 가이드북을 먼저 구했다. 고명섭의 니체 극장이다.

  고명섭은 기자이다. 그가 이름을 알린 건 서평 때문이다. 그의 서평은 출판사의 보도자료에 의존한 피상적 언급이 아니라 텍스트를 완전히 해체하고 반죽한 다음 자신의 손으로 두드리고 늘려 면발을 뽑아낸다. 거기서 뽑아낸 문장은 수타면처럼 쫀득쫀득하고 깊은 맛이 우러났다. 인문, 교양, 사상 부문의 독보적 입지를 다진 그는 저널리스트의 장점을 유감없이 구사한다. 저널리스트 글쓰기의 특징인 정보를 알기 쉽고 가지런하게 가공하여 전달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뿐만 아니라 철학을 공부한 그는 인문사회분야에서 전문연구자 못지않은 내공을 보여준다.

 

  인문, 사상, 철학 분야의 글은 아카데믹한 글과 저널리스틱한 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깊이 있는 분석과 함께 날것의 개념을 맛볼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대중 언어로 소통하는 데엔 장벽이 있다. 후자는 알기 쉽게 가공해 독자들에게 떠먹여 주는 유용함이 있지만 방부제를 쓴 탓에 영양분으로 흡수하기엔 한계가 있다. 고명섭은 양자를 넘나들며 조리한다. 어려운 개념은 풀어쓰면서도 쉽게만 전달하려다 영양소까지 파괴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그는 아카데믹과 저널리즘의 한계 속에서 균형을 잘 잡아내는 작가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글을 신뢰한다.

 

  니체 관련 텍스트는 니체가 직접 쓴 책과 니체와 관련한 담론 두 가지로 나뉜다. 어려운 사상서가 종종 그렇듯 일반인들이 일차 텍스트에 직접 부딪치는 건 위험하다. 여기서 위험하다는 건 오독으로 발생하는 부작용이 아니라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독서 자체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부작용보다 더 위험하다. 눈길이 없으면 존재도 없는 것이니 말이다. ㅡ악풀이 무플보다 낫다는 웹의 격언이 이에 꼭 들어맞는다ㅡ 그래서 관련 전공자들이 풀어쓴 책들의 안내를 받는 것이 안전하다. 날것을 삼켜 소화불량을 일으키느니 소화가 쉽도록 가공한 것을 섭취하는 게 그나마 낫기 때문이다.

 

  니체의 글 또한 그렇다. 스무권이 넘는 방대한 저서를 섭렵해야 하는 양적인 문제도 그렇거니와 그의 사상이 전기 중기 후기 등이 시간차를 거치면서 서로 모순되기도 하고 비약하기도 하고 때론 연대기를 종단하며 초기의 사유로 되돌아가기도 하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만 들어내어 삼켰다가는 오독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마디로 니체라는 산은 거대하기도 하거니와 산세가 험해 길을 잃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칫하면 떨어져 다칠 수도 있다. 니체의 사상은 하이데거, 야스퍼스, 라캉, 들뢰즈, 데리다, 푸코 등 수많은 철학자들이 마사지한 탓에 말랑말랑한 니체에서부터 거칠고 험한 니체, 가지런하고 정련된 니체에서 어수선하고 갈피를 못 잡는 니체, 냉철하고 차가운 니체에서 뜨겁고 격정적인 니체, 부드럽고 겸손한 니체에서 오만하고 거친 니체까지, 그 실체를 파악하기조차 쉽지 않다. 하다못해 근대사회의 최대 오류인 나치마저 니체에게서 한줄기 이념을 추출하기도 했으니까ㅡ나치는 히틀러가 아리안 민족을 이끌 위대한 영웅이라는 이미지를 조작하면서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에서 제시한 초인Übermensch에 빗대었다ㅡ

 

  이런저런 니체 관련 책 중에서 나는 고명섭의 니체 극장을 택했다. 고명섭은 니체 독법을 하나의 극장으로 상정하고 작품의 연대에 따라 저서를 하나하나 무대 위에 올려놓는다. 그의 책은 전기도 아니고 평전도 아니고 해설서도 아니다. 니체의 생을 따라가면서 그의 사상의 흐름을 무대 위에 올려놓고 조명을 비춘다. 조명은 후대 철학자들이 비추는 것이기도 하고 저자가 직접 돋보기를 들이대기도 한다. 환하게 비춰주는 스포트라이트 덕분에 독자는 니체의 사상 중 특정 부분에 대해 세밀히 살필 수 있다. 니체 극장의 무대 위에서 고명섭은 능숙한 조명 기사가 되어 등장인물(니체의 작품)의 연기를 빛나게 해주고 있다.

 

  데리다는 니체의 문장을 해석학적 몽유병의 기념비라고 했고, 야스퍼스는 니체의 텍스트는 근본적으로 자기모순을 품고 있다고 했다. 데리다의 해석학적 몽유병이 야기하는 결정 불가능성과 야스퍼스가 지적하는 텍스트의 자기모순으로 인한 통일 불가능성 때문에 니체의 글은 독자들에게 언제나 불안의 그림자를 남긴다. 고명섭은 니체의 정신을 탐사하는 한 권의 책을 쓴다는 것은 이 불안에 맞서 불안을 뚫고 나아가는 일이라고 했다. 그 과정에서 좌절감, 때로는 절망감을 안기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서 멈춰서면 니체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불안을 가슴에 품은 채로 니체 안으로, 니체가 자신의 내면에 파놓은 어두운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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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dix님의 댓글

perdix 작성일

애초 원고에
'어느 한 부분만 들어내어 ㅆㅣㅂ었다가는 오독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라고 씌였는데,
파일을 업로드를 하니 'ㅆㅣㅂ' 자가 금지단어라서 등록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삼키었다가는'으로 고쳤습니다.
'ㅆㅣㅂ' 자가 왜 금지단어죠?
아는 사람 가르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