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인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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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연청 작성일23-07-11 22:12 조회244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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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인상기
정광모 소설가
하미마을 위령비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철제 울타리가 가로막았다. 멀리서 위령비를 바라만 보았다. 입구에 꽂힌 낡아서 찢어진 베트남 국기가 바람에 펄럭였다. 나는 오래도록 국기의 별을 지켜보았다. 그렇다. ‘과거를 덮고 미래로 나아간다’는 베트남 정부의 의지가 낡은 깃발에 모여있었다. 1968년 2월 22일 청룡부대는 135명의 하미마을 민간인을 죽였다. 마을을 찢었던 총소리와 비명은 단지 박제된 비석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전쟁이라는 과거를 옆으로 조용히 치워놓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 한국 정부가 베트남전쟁 참전에 사과하면 고맙지만 그건 지나간 일이라고 답한다. 베트남 정부는 사과보다도 원조와 차관과 투자가 더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포크너가 말했듯이 과거는 죽지 않는다. 아니, 과거는 지나가지도 않았다.
베트남 정부는 1986년 개혁 프로그램인 이른바 ‘도이머이’ 정책을 시행한다. 계획경제를 포기하고 시장경제로 전환이었다. 1980년대 중반 통일 베트남의 경제는 침체를 넘어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남부에서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대부분 작동을 멈췄다. 집단주의 경제 방식에 순응한 북부의 많은 사람들조차 사회주의를 향한 열망이 약해졌다. 설상가상으로 흉작이 이어져 광범위한 기아를 초래했다.
2003년 호치민에서 작가 반레를 만난 적이 있었다. 반레는 작가의 본명이 아니라 전사한 친구의 이름이었다. 그는 시인이 되고 싶어했던 친구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하노이 출신인 반레는 1960년대 후반 고등학교를 마치고 호치민 루트를 따라 남베트남으로 와서 전쟁에 참여한다. 같이 내려온 고등학교 동창 350명에서 전쟁이 끝난 후에 단지 3명 만이 살아남았다. 호치민 루트를 내려오면서 미군의 폭격과 질병 그리고 기아로 절반이 죽었다고 했다. 미군의 화력과 물자는 그만큼 대단했고 공포스러웠다. 반레 작가는 우리는 승리했고 승리자로 미국에 어떤 배상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부심 가득한 선언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 선언은 ‘미래’라는 또 다른 고지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베트남 정부가 말하는 ‘미래’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 악명 높은 베트남 관료의 부정부패는 아닐 것이다. 관료는 공산당의 간부가 옷을 바꿔 입은 모습이다. 어제의 혁명전사는 오늘의 부정부패에 찌들어있다. 내일 그리고 미래에는 어떤 모습이 되는 것일까?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자본의 힘에 휩쓸려 자본의 뜻이 주조하는 모습으로 새겨질 뿐인가. 베트남 정부와 한국 정부는 사이가 좋다. 삼성을 비롯한 기업들은 베트남에서 환대받고 좋은 직장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씀씀이 큰 한국 관광객 역시 베트남인을 기쁘게 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은 베트남의 미래가 될 수 있을까?
이번 베트남 여름소설학교에서 베트남 현지 가이드 ‘엉’에게 물었다. 베트남 청년들은 어떤 희망을 바라는가? 엉이 대답했다. 성공과 부자가 되는 것이다. 한국 청년들도 그렇지 않은가? 아니다. 한국 청년들의 일부는 그렇지만 상당수는 그런 희망을 품을 수 없다. 이제 한국인의 상층과 안정되고 질 좋은 일자리는 소수에게만 개방되고 있다. 한국의 계급 격차는 벌어질 대로 벌어져 가파른 계단을 급히 올라간다고 해서 꼭대기 층을 따라잡을 수 없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야만 한다. 케이블카 역시 부모의 재력이 좋은 사람만 입장권을 살 수 있다.
한국사회는 ‘각개약진’과 ‘각자도생’의 정글 전쟁이다. 그건 베트남인들이 치른 게릴라전으로도 극복하지 못할 자본의 높은 성벽이다. 자본의 성루는 일단 성벽을 쌓고 해자를 두르면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며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사회는 세계에서 출산율이 1보다 낮은 유일한 나라로 출산율 0.78을 자랑한다. 노인 빈곤율은 세계 1위고 청년과 노인의 자살율도 1위다. 하지만 한국은 부유한 나라고 한류는 세계로 전파되고 있으며 한국의 자본과 관광객은 세계에서, 자본의 종주국인 미국에서도 환영받고 있다. 이 기묘하고 서로 어긋나는 ‘현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혹시 베트남 정부는 이런 한국의 ‘현실’을 쟁취해야 할 ‘미래’로 생각하는 것일까? 한국의 경제력은 탐나지만 저출산과 같은 부작용은 피하고 싶은 것일까? 그러나 한국식 경제발전을 꾀하면 곧 알게 된다. 양자는 동전의 양면으로 함께 붙어 있다는 것을.
이런 한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은 베트남 전쟁에서 가져온 달러였다. 1967년 한 해에 베트남 특수로 들어온 1억 5천만 달러는 그해 한국 수출 총액의 47.3%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1966년 베트남 파견 기술자 월급은 530~580달러였다. 당시 한국 노동자 월급의 15배였다. 1970년에 가장 인기 있는 직종이었던 은행원의 초급이 월 3만 원이었다. 한국의 재벌들은 베트남 특수를 기반으로 뼈대를 잡았다. 박정희 정권은 이 돈으로 경제개발을 가속화했고 나름 성공했다. 그래서 우리는 뜨끈한 돈 보따리를 챙겨온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만 기억한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는 '흥남부두의 금순이'와 함께 한국 사회의 원형을 만들었다. ‘온동네 잔치’였던 베트남 특수는 세계가 놀란 '압축성장'을 만들었고 동시에 그 '압축성장'은 역시 경이로운 '압축파괴'를 불러왔다. ‘압축파괴'의 필연적 결과인 0.78의 출산율과 '킬러문항'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참전을 결정한 박정희 정권 스스로 공표했듯이 참전은 1960년대 가난한 반공국가의 야심찬 국책사업이었다. 성과 역시 국가적으로 포장되었다. 한국 경제발전은 베트남인의 피를 덮어쓰고 미국의 등에 업혀서 얻은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은 전쟁 당시 한국군이 주둔했던 중부 지방 다낭에서 2023년 현재 달러의 위력과 맞먹는 원화를 뿌리며 환대받고 있다. 그러나 맥벡스가 말한 것처럼 살인자의 손에 묻은 피는 씻어지지 않는다. 한국인과 한국사회는 베트남 전쟁의 피를 깡그리 잊어먹었지만 하늘에 있는 인연과보라는 장부에서는 지워지지 않는다. 오늘 한국사회의 난맥상은 베트남인의 피에 그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선미 마을(미라이)학살 장소에는 기념관과 위령 조각이 세워져 있다. 베트남 가이드 엉에게 물었다. 학교에서 1968년 3월에 있었던 선미 마을 학살 사건을 배웠냐고? 자신은 배우지 못했으며 여기 와서야 이런 학살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베트남 전쟁에 한 획을 긋고, 미국 반전 운동을 격화시킨 대사건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베트남 정부는 또다른 의미에서 자신들의 ‘핏자국’을 지우려고 한다. 그 핏자국은 서방의 투자 유치에 도움이 되지 않는 흔적이다. 한국은 한국대로 과거의 핏자국을 망각했으며, 베트남은 베트남대로 의도적으로 과거의 핏자국을 잊어버리려 노력하고 있다. 아직도 고엽제와 지뢰로 인한 피해는 일어나지만 그건 수습할 수 있다. 그렇다. ‘미래’가 중요한 것이다. 어떤 ‘미래’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상상의 미래일 수도 있고 백일몽의 미래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도착해서야 알 수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간 바나산 리조트에서는 새 건물을 짓기 위한 콘크리트 파일을 박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일요일에다 야간 공사였다. 호이안 야시장 노점에서 만난 아가씨 판매원은 서울 표준말을 능숙하게 구사하면서 접시와 장신구를 팔았다. 한국말을 어디서 배웠냐고 물었더니 학원에서 공부했으며 낮에는 한국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알바를 뛴다는 것이다. 투잡이었다. 베트남 가이드 엉도 고향 부근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매니저가 관리한다고 말했다. 투잡이었다. 두 사람의 표정은 밝고 희망에 차 있었다. 그들은 한국 드라마와 한국 음악에 매혹되어 있으며 한국은 그들이 지향해야 할 모델이었다.
국가와 국가 사이는 나쁠 때도 있지만 인민은 서로 늘 유대한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은 이렇게 바꿔야 할 것 같다. 국가와 국가 사이는 나쁠 때도 있지만 자본은 서로 늘 유대한다로. 미래의 정체는 알 수 없지만 베트남이 가고자 하는 미래는 환할까? 길을 잃지 않고 갈 수는 있을까? 이미 세계화의 문은 닫히고 있어 한국이 1960년대와 70년대에 수출경제로 챙겼던 시대적 이익은 사라지고 있다. 다낭에서 머문 특급호텔 ‘멜리아 빈펄 다낭 리버프론트’의 조식은 풍성했다. 그 멜리아 호텔의 주인은 베트남의 삼성으로 불리는 빈그룹이다. 빈그룹은 한국의 선례를 따라 선진경제로 나아가기 위해 자동차와 휴대폰을 비롯한 제조업에 진출해서 성공하기를 열망한다. 쉽지 않고 성과는 잘 나지 않는다. 더구나 마지막 세계화의 물결에 올라탄 막강한 중국이 하루하루 제조업에서 약진하고 있다. 제조업에서 중국과 경쟁하기는 어렵다. 기술축적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베트남이 언제까지 의류와 관광과 부동산 개발에 의존할 수는 없다. 기후위기의 시대에 베트남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생태주의로 무장한 것도 아니다.
어쨌든 투잡을 뛰는 야시장의 판매원과 베트남 가이드 엉의 미래에 축복이 있기를.
그리고 그 미래가 한국의 현재를 닮지 않기를.
2023.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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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청님의 댓글
연청 작성일소병국의 <동남아시아사>와 김주현의 <전쟁자본주의의 시간>을 인용한 주를 달았는데 여기 글에는 올라가지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