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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서유기賊西遊記 2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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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erdix 작성일23-01-26 11:04 조회2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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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한 모옥에 들어가 의관을 정제하고 정식으로 맞배한 후 연장자 신모가 방문의 설을 펼쳤다.

지리산은 신라 시대엔 남악이라 불리며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자가 된다하였고, 혹자는 지혜로울 지에 다를 이, 아는 게 다른 이들이 지내는 산이라고 했습니다. 과연 명성답게 신출한 기인이 머물만한 곳이오. 심산의 적막에도 불구하고 창작의 열정이 금강처럼 단단하오니 그 비결이 궁금하외다.”

 

이도사 답하길

마음이 고요하면 홍진이 바로 벽산이고, 마음이 고요하지 않으면 푸른 산 속碧山에 살아도 티끌 세상紅塵과 한가지입니다. 깊은 계곡에 머물러도 저잣거리의 큰길에 있는 듯이 하고, 늘 마음가짐을 열 마리의 벼룩을 몰 듯하면 겨우 한줄기 문장이 나옵니다(留幽谷如通衢, 馭寸心如十蚤, 僅以一句)[].

평문平問에 유현幽玄한 답이 나오자 도적들 어쩔 줄 몰라 누구는 손을 비비고 누구는 주머니를 뒤지고 누구는 괜히 먼산을 둘러보더라.

 

소박한 소채蔬菜를 마다하고 준비해간 고기를 지글지글 구워대니 산중에 웬 육취인가. 겨울 산천만큼 메마른 도사의 육신에 보한다고 생각하니 이 또한 보시布施라면 보시라면서 도적들 제 입에 먼저 들어가기 바쁘더라.

 

대충 배를 채우자 이도사가 벌떡 일어서더니, 유붕이 자원방래니 어찌 흥이 나지 않을쏘냐. 벽에 걸린 금을 내려 무릎에 앉히자 이에 질쏘냐 신모가 적을 꺼내 입술에 대자 풍류에 시가 빠지겠는가 김모가 절창으로 한 수 뽑아내니 어풍지객(馭風之客, 신선)이 따로 있나 예가 바로 무릉이로다. 권모 황모 얼이 빠진 채 추임새 넣기 바쁘더라.

 

한바탕 유흥가무가 끝나자 본설本說이 시작되었다.

 

그 옛날 노선생老子이 말했듯이 대도폐이유인의大道廢而有仁義, 큰 도가 제구실을 못 하므로 사람들이 인의로써 서로를 옭아매는 것처럼 큰 이야기大說가 없으므로 사람들이 작은 이야기小說에 매여 심상心象만 비추이고 있는 것이오. 심상은 이걸 비추면 이게 나타나고 저걸 비추면 저게 나타나며 청정무구의 본래 모습은 드러내지 못하는 법, 허튼 심상을 걷어내고 깊은 속을 들여다보면 심연에 다다르고 거기서 비로소 큰 이야기가 우러나올 것이오. 더 이상 작은 이야기에 주저리주저리 얽매이지 말고 대설을 찾아야 할 것이오.“

신모가 말문을 열었다.

 

큰 사람은 큰 것을 말하고 작은 사람은 작은 것을 말하오. 그러므로 큰 사람이 큰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작은 사람은 알아듣지 못하는 법이오. 이에 살필 것은 한 가지이오. 바탕이 맑다면 스스로를 믿기 바라오, 심성이 맑아야 뜻이 맑고 뜻이 맑아야 인심과 천심을 두루 헤아릴 수 있는 글이 나으니, 그런 연후에 뽑아낸 글을 비로소 대설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오.“

권모가 말을 받았다.

 

소설은 꾸미지만 대설을 절로 우러나오는 것. 여기 모인 도반들은 작은 이야기를 억지로 짜내지 말고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큰 이야기에 마음을 실어 보내야 할 것이오. 그러기 위해선 큰 이야기를 담은 큰 그릇이 필요한 바 원만구족圓滿具足을 갖추어야 할 것이오. 원만구족은 조금도 모자라거나 약간의 결함이 없이 모든 것을 두루 갖추되, 지극히 공평해서 어느 한 편으로도 치우침이 없고 털끝만큼의 사사私邪가 없이 글쓰기에 임한다는 뜻이외다.“

말 못해 죽은 귀신 있으랴 김모 역시 말우물에서 구라 한 바가지 길어 내었다.

 

대저 소설가는 시대의 징후에서 개화를 꿈꾸고, 시대의 폐허에서 낙과를 뒤적이지만. 대설가는 시대의 강물을 들이마셔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자입니다. 솜씨가 교묘한 대설가는 마치 준마가 시내를 단숨에 건너뛰는 것 같고, 재주가 못난 소설가는 노둔한 소가 산을 오르는 것과 같사옵니다(巧者如駿馬跳澗, 拙者如駑牛登山).

기중 내공이 딸린 황모가 딴에는 보탠다고 하나마나한 말을 덧붙였다.

 

우리의 경은 비슷할지라도 근과 기는 서로 달라 작황이 일정치 못하옵니다. 이에 회통會通을 쟁기 삼고 교설巧說을 가래 삼아 서로에게 도움을 주며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내 비록 몸은 산중의 누추한 초옥에 거하지만 심적으로는 천지를 관통하는 호연지기가 가득한 바 천하를 주무르는 글을 토해내 장부의 꿈을 이룰까 하오.”

끝으로 이도사가 말하고는 눈앞에 놓인 무색무취 백주를 사발에 콸콸 따르더니 단번에 주욱 들이켰다.

 

산중 고택에 일등一燈을 밝힐 무렵이 되자 일행은 하산의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도사의 발심 수행이 우리 도적들의 마음을 밝혀주었습니다.”

네 도적 일제히 합장하자,

무소의 뿔처럼 대범하고 거북의 등처럼 든든한 문우님들의 열정에 빈도의 마음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부디 성불 아니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도사가 포권의 예로 답하였다.

 

네 도적들 한소식 깨친 선승禪僧처럼 각자 대설비책大說祕策을 품고 구름에 달 가듯 동쪽으로 향하니 항차 문단에 평지풍파, 강호에 경천동지, 시방세계에 천지개벽이 일어날 것을 뉘라서 알리오. 동천冬天에 떠오른 아미蛾眉 같은 달이 하냥 웃으며 이들의 가는 길을 지켜보더이다.

 

 

 

 

 [] 송나라 때 이방헌(李邦獻)이 쓴 성심잡언(省心襍言)’에 있는 '밀실에 앉아서도 큰길에 있는 듯이 하고, 작은 마음 모는 것을 여섯 마리 말을 몰 듯하면 허물을 면할 수 있다(坐密室如通衢, 馭寸心如六馬, 可以免過).'를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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