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자유게시판 >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Busan Novelists' Association

 

만덕고개 넘는 길 -감상평

페이지 정보

작성자 perdix 작성일22-09-30 16:49 조회439회 댓글0건

본문

  

<오늘의 좋은 소설> (가을, 62호)>에서 좋은 소설을 만났기에 감상평을 적었습니다.

 

 

 

 삶의 세가지 층위(層位)

-김하기의 <만덕고개 넘는 길>을 읽고

 

                                                                                                                                    황 인 규

 

 

 

  ’성학이 죽었다.’

  소설의 첫머리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알린다는 건 기술(記述)이 아니라 선언일 가능성이 있다. 작가는 죽음이라는 사실의 전언(傳言)이 아니라 죽어야 마땅한 당위를 전하고 싶은 게 아닐까. 김성학은 나의 친구이다. 처세의 달인인 그는 권력의 달콤한 과육을 항상 빨아먹는 인간이다. 그런 인간의 죽음을 선언하면서 작품은 시작한다.

 

  부산의 지형은 금정산과 백양산이 남북을 가로질러 길게 누워있는 형국이다. 두 산 사이에 움푹 팬 곳이 만덕고개이다. 예로부터 사람들이 구포와 동래 사이를 왕래할 때는 만덕고개를 넘나들었다만덕고개에는 3개의 길이 있다. 걸어서 넘던 시절의 길을 찻길로 넓힌 만덕고개길, 70년대 완공한 1만덕 터널. 늘어나는 교통량을 감당할 수 없어 90년대 새로 뚫은 2만덕 터널. 3개의 길은 점점 고도가 낮아지고 넓어졌다. 세월이 갈수록 차량통행의 효율이 좋아진 것이다.

 

  나는 김성학을 조문하기 위해 동래의 D병원에 가기 위해 차를 몰고 나온다. 넓고 빠른 2만덕 터널로 가다가 갑자기 만덕고개길로 핸들을 튼다. 그 길은 나의 과거가 올올히 배어 있는, 청춘의 병풍도가 주르륵 펼쳐진 곳이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지명수배당할 때 숨어지낸 곳이고, 아내와 연애의 추억이 서려 있는 병풍사가 있고, 진리의 섬광을 언뜻언뜻 비쳐주는 석공스님의 절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만덕고개길로 들어서니 갑자기 세상이 조용하고 딴 차원의 세계로 들어온 느낌이다. 차창을 열고 라디오 뉴스를 오디오로 전환해 가요 향수를 듣는다. 중략오랫동안 잊었던 젊은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몽상과 현실의 달콤한 혼동, 몰록 다가오는 젊은 날의 기쁨과 우수, 그리고 수배와 도피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만덕고개 넘는 길>에서

 

 

  만덕사는 과거 범어사보다 큰 대찰이었지만 고려 공민왕 때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폐사되고 만다. 나는 만덕사 폐사지를 떠올리며 동래의 D 병원으로 향한다. 한때 흥성했던 폐사지를 출발해 현대문명이 집약된 병원으로 향하는 것이 소설의 출발점이다. 과연 도착지엔 무엇이 있을까,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서 무엇을 보여줄 건가. 작품의 얼개는 이 구조를 따라간다.

 

  푸코가 지적했듯이 병원이란 근대사회의 권력구조를 드러내는 곳이다. 권력자는 은폐되고 권력의 행사는 은밀하다. 보이지 않는 권력으로 인해 대상자는 자발적 복종으로 순치된다. 나는 교도소 의사로부터 반사회적 인격장애라는 진단을 받는다. 이후에도 의사들은 나를 망상에 사로잡힌 분열증 환자로 취급한다. 나는 근대사회의 지배질서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방인이자 사회체제에 저항하는 이단아로 낙인찍혔다. 한편으론 과거의 이상론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철없는 작가이기도 하다.

나는 현실의 모든 걸 부정한다. 과거 운동권 동료이자 변절의 달인 김성학은 죽어 마땅했고, 김성학과 바람이 난 아내 역시 죽어야 했다. 석공 스님만이 혼탁한 나의 정신을 가끔 찬물로 씻어준다. 석공은 나에게 잡석이 가득 들어 있는 망태를 내려놓으시고 그만 내려가라고 한다.

 

  구불구불한 만덕고개길을 내려와 D병원에 도착해 의사를 만나고 나서야 나는 옛길을 넘어오는 동안 망상에 시달렸음을 깨닫는다. 김성학은 죽지 않았고, 내조에 충실했던 아내는 백혈병으로 죽었다. 정신과 의사는 현실이라는 망치를 들고 나의 망상을 여지없이 깨버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복잡한 만덕고개로 둘러 가지 마시고 2만덕 터널로 해서 곧장 집으로 가십시오.” 진료를 마친 의사는 나에게 빠른 길을 권한다.

 

 

나는 의사의 말대로 2만덕 터널로 곧장 집으로 가기로 했다. 내 삶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2만덕도 만덕고개도 아닌 1만덕에 진실이 있을까. 나는 의사의 말대로 2만덕 터널로 가다가 갑자기 나의 손을 잡아채는 어떤 기운에 이끌려 2만덕 길을 버리고 1만 만덕 터널로 핸들을 돌려 올라간다. 나제통문보다 약간 긴 터널 앞쪽에는 만덕고개길을 빠져 올라가는 작은 길이 나 있다. 언제 핸들을 살짝 돌려 그 길로 빠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만덕고개 넘는 길>에서

 

 

  2만덕 터널은 현대문명이 뚫어놓은 길이다. 자본주의는 빠른 사회를 원한다. 빠르고 거대한 이동을 통해 자본주의는 고도화된다. 자본은 회전율을 높이면서 부의 효과를 배가시킨다. 자본이 돌리는 회전목마에 올라탄 현대인은 점점 빨라지는 속도에 정신 차리지 못한다.

 

  투잡을 넘어 쓰리잡까지 뛰는 아내와 달리 빈둥거리는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볼 때 반사회적 인간이다. 그러기에 약으로 다스리고 병원에서 통제되어야 한다. 사회에 적응하지도 반항하지도 못하고 있는 나는 오로지 망상으로만 탈출한다. 그 망상이 전혀 무용하지 않다고 작가는 말한다. 현실 그 너머를 꿈꾸는 몽상은 현실의 질곡을 베어내 썩은 살을 드러낸다. 고름이 줄줄 흐르는 상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나제통문보다 약간 긴 1만덕 터널은 2터널처럼 현란하진 않지만 그래도 인위적으로 뚫은 길이다. 하지만 속도만 늦출 뿐이지 자본의 논리가 여전히 통용되는 길이다. 반면에 만덕고개길은 산을 깎거나 구멍 내지 않고 능선을 따라 길을 내었다. 구불구불한 길은 속도를 내지 못하지만, 아니 못하기에 향수에 젖게 만든다. 폐사지처럼 황폐해진 정신에 한 떨기 꽃을 피우기도 하고 여전히 원시적인 석기시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의 본능을 일깨우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 길엔 관세음보살이 있다.

 

 

왼손에 든 감로정병과 오른손에 든 반짝이는 영락구술, 난 양손에 든 두 지물에서 묘한 대조를 보았다. 감로정병으로 세상을 치유하겠다는 좌파적 세상 구원과 최고의 보물을 소유한 우파적 개인 행복. -<만덕고개 넘는 길>에서

 

 

  좌파적 세상 구원과 우파적 개인 행복의 조화란 종교적 혹은 신화적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 한다.‘는 니체의 말을 품으며 무한 혼돈을 마다하지 않는다.

돌아가는 길, 나는 의사의 권유를 뿌리치고 1만덕 터널로 향하다가 만덕고개길로 빠져 올라가는 작은 길 앞에서 다시 망설인다. 그 길은 끝내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자 저 밑바닥에서부터 이끄는 삶의 시원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