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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문의 독서일기-빛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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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2-08-06 14:25 조회3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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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빛의 제국ㆍ

김영하
문학동네 429 P
2021년 2판 25쇄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할 때 키보드 옆에 반납한 책들을 모아두는 작은 테이블이 있다. 사서가  책을 정리하지 않아 서가에 꽂히기 전에 모아둔 책들이다. 요즘 사람들이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궁금해서 반납한 책들을 훑어보며 지날 때가 가끔 있다. 이 책은 PC에서 책을 찾아 프린트로 뽑은 메모를 들고 서가에서 찾은 게 아니라 반납 책더미에서 골라낸 책이다. 나는 이 책을 10년전 쯤에 읽었는데, 내용이 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책을 들고 후루룩 페이지를 넘겨봤지만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책을 대출받고 읽기 시작했다. 북한에서 남파한 간첩 이야기다. 문장은 세련되고 매끄러웠으며, 내용은 둔중했다. 한국 소설에는 고전이 없다고 한탄했는데 이 소설만큼은 충분히 고전의 반열에 들 수 있는 뛰어난 작품이었다. 작가가 대충 쓴 게 이니라 온 내공을 쏟아내 피와 땀을 철철 흘리며 쓴 소설이었다. 무릇 고전은 몇번을 읽더라도 매번 감동을 느껴야 고전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평양외국어대학 영문과에 다니던 북한 엘리트 청년은 당의 지령을 받고 남파한다. 평양에서 서울 종로를 만든 세트에서 훈련받은 그는 남쪽에 적응하기 위해 연세대 수학과에 입학한다. 그리고 1980년대의 대학 풍경, 반미와 최루탄, 친북과 주체사상 등을 체험하고 사회로 나와,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사업을 해 서울의 평범한 중산층으로 살아간다. 그를 남파시킨 북쪽 고위층이 숙청된 후, 그는 끈이 떨어진 채로 북측으로부터 버림받은 듯, 북쪽 일을 잊고 남쪽 생활에 적응해서 살아간다. 남쪽 생활 20년이 될 무렵 느닷없는 지령이 내려온다. 그만이 알 수 있는 하이쿠 메시지를 받는다. '문어 단지여 허무한 꿈을 꾸네 하늘에는 여름달.' 북으로의 소환이었다. 16세의 공부 1등하는 딸과 외제차 딜러인 아내는 물론, 자신마저 거의 잊어버린채 지낸 과거를 소한당한 그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는 어떤 경우에도 사악하다거나 비열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았으며 세상을 오래, 그리고 어렵게 살아온 남자만이 획득할 수 있는 단단한 무심함으로 무장한 사내, 그 어떤 경우에도 제 감정을 다른 일에 앞세우지 않는 남자로 살아왔다. 역설적 수사를 좋아하지 않았던 그가 선택할 폭은 지극히 좁다. 독자는 묵묵히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때까지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

아주 잘 쓴, 오래 남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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