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루에 한번 올라오면 다음 주자가 정해질 때까지
아래로 내려가 땅을 밟을 수 없었다. 그게 파수꾼의 운명이었다.
표제작 「밤의 망루」는, 작가가 프란츠 카프카의 『성(城)』을 오래 마음속에 어떤 이미지로 품고 있다가 쓴 소설이다. 「밤의 망루」에서는 고독한 망루에 홀로 서서 거대한 성을 지키는 파수꾼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임무를 안은 채, 어떤 지시가 내려질 때까지 홀로 성을 지켜야만 한다. 작가는 이를 두고 “불가항력의 본연적 임무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작가는 “아무것도 없는 빈 땅, 안개로 휩싸인 적막한 공간에 발을 딛으며 헤맸다. 오리무중. 추상에서 구체화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시간이 걸렸다”고 술회한다. 매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상을 반복하던 파수꾼의 삶은, 한 여인의 등장으로, 그리고 그녀의 탈주로 요동치게 된다. 파수꾼과 같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던 그녀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리고 그런 그녀가 파수꾼에게 남긴 것은 과연 무엇인가. 망루 위의 파수꾼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네 인생의 마무리는 멋지게 환상적으로 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 자, 들어봐.”
작품집의 문을 여는 「검은 붓꽃」은 몸의 소리를 애써 부정하고 가두려던 시대의 이야기이자, 그런 시대를 살아온 한 여성의 모습을 담은 소설이다.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고, 무엇보다 두려워하던 그녀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성기를 들여다보게 된다. “깊숙이 감춰진 성기를 드러내어 똑바로 바라보긴 처음이었다.” 작가는 한 사람 안에 고착된 고정 관념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전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의 관습적인 시선을 자기 것으로 내면화해서 그것을 실체라고 믿는 오류를 저지른다. 특히 그동안 여성들은 자기 신체의 주인 노릇을 못한 경우가 많았다. 작가는 질문한다. 과연 지금은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서 살고 있느냐고.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하루를 선물하는 건 어때요.
작품집의 두 번째 이야기, 「홍천」은 어느 해 여름, 장의차처럼 검은 차를 탄 네 사람의 모습을 그린다. 그날 서로 처음 본 그들은 강원도 홍천으로 가는 차에 동승했다. 과연 그들은 왜 홍천으로 가는가. 작가는 언젠가 홍천에 가본 적이 있는데, 그곳에 가기 전부터 어떤 정보도 없었음에도 ‘홍천’이란 장소로 소설을 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곳을 둘러보며 어떤 이야기가 자신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왔다고 회고한다. 마치 이야기가 “물 흐르듯이 내 안에서 흘러나와 소설 속 주인공들이 알아서 자기 길을 만들어 간 것이다.”
이순은 발가락 낱낱을 떼어 움직여주었다. 너희를 덩어리가 아닌 개별적 인격체로 존중할게.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는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여도 속으로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부부, 조금 더 정확히는 상운의 아내 ‘이순’의 이야기이다. 한때는 그들에게도 “서로의 심장에도 반짝하고 불이 켜지던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이순과 상운은 “각자 다른 별”이 되었을 뿐이다. 어느 날 상운이 이순을 위한 선물로 사들고 온 어항 속 물고기를 보는 것이, 이순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넓지도 않은 집 안에서 이순은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잃”고, “갈 곳이 없다”고 느낀다. 오랫동안 살아온 부부 사이라 해도 가장 가까이 밀착해서 산다 해도 서로의 마음속을 잘 들여다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눈치조차 못 채는 경우도 있다. 너무나 다른 성향이나 생각을 갖고 있으므로 어느 한쪽이 인내하지 않으면 가정을 건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작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물밑의 가라앉은 속말을 들여다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착하다, 천사 같다, 자애롭다, 자비롭다’ 같은 칭송 뒤에 가려진 불편함, 거북함.
지금도 순간순간 사라지고 있어.
코로나 시대, 점점 더 삭막해지는 사회 분위기와 단절된 관계 속에서 그래도 버틸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작가는, 그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고 말한다. 「옛날에 농담이 있었어」에는 그런 작가의 생각이 투영되어 있다. ‘경’과 ‘나’가 나누는 대화, 농담과 서로를 향한 시선, 마음. 그 속에서 우리는 모든 게 너무 빠르게 일회용품처럼 소비되고 버려져 ‘옛것’이라는 창고 혹은 ‘낡음’, ‘쓸모없음’이라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가 박제되는 고도로 디지털화되고 스피디하게 전환되는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작고 연약한 것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꿈틀거리는 생명력, 야생성, 자유를 향한 갈망을 엿보게 된다.
모든 것들은 소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2022년 제27회 부산소설문학상 수상작, 「소리와 흐름: 록의 부치지 못한 노래」는 상실한 것에 대한 그리움, 이별과 만남의 우연과 필연, 이어짐과 끊어짐의 반복, 영원과 순간. 찰나의 스침같이 반짝이다 스러지는 것들에 대한 록의 헌사이다. 실험적인 문체의 변화와 파격을 시도해 하나의 아름다운 화성의 울림으로 다가가고 싶었던 작가는, “누구에게나 있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을 밀도 있는 문장으로 그려 냈다. 가볍게 문장을 끊어버리는 콤마들, 단어의 무수한 반복, 그러는 순간 갑자기 길게 이어지는 문장들은 짧은 들숨과 긴 날숨이라는 상처의 호흡법을 매력적으로 형상화했다. 이 작품은 마음이 가난한 시대, 우리에게는 어쩌면 실종된 누군가가 필요하며, 실종의 그리움이 우리를 견디게 한다는 성찰의 지점을 선사한다.”(심사위원 유익서·박향·권유리야)
시간은 흘러간 게 아니라 어딘가에 스며 있다 불쑥 나타난다.
시간은 사라지는 게 아니다.
「멈춘다 흐른다」는 얼핏 보면 전혀 연관성 없는 장면들을 갖다 붙인 듯한, ‘파편적 구성’을 취한다. 출근길 위를 흐르다 멈추다 하던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토끼, 도로로 뛰어든 흰 고양이를 본다. 눈을 감았다 뜨는 찰나의 순간, 꿈도 아닌 어떤 장면이 스르륵 펼쳐지는 것을 경험한다. 과거에 바라본 풍경과 현재의 순간이 연결되고, 과거의 기억이 침투한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 현실과 가상, 지금 이 순간과 저 순간이 교차한다.
그렇게 작가는 “시간의 조각배에서 흔들리는 삶의 파편들”을 그려 낸다. 누구나 한 번쯤 “삶은 순간이고 허깨비” 같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장소, 현재라는 시간, 만져지는 감촉이 실체인지, 실재하는지 의심하고 혼란스러워 한다. 작가는 “그런 느낌을 동시성의 공간에서 펼쳐보고 싶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