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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an Novelists' Assoc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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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평양

저자:이윤길 / 출판사:신생(전망)

[작품 소개]
선장 출신으로 시인이자 소설가로 꾸준히 활동해 온 이윤길 작가의 해양소설집이다. 이번 소설집에는 「남태평양」 「북태평양」 「남서대서양」이라는 굵직한 중편소설 3편이 실려 있다.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인간 삶의 다양한 모습들을 핍진하게 그려내고 있다. 「남태평양」은 요트를 타고 남태평양을 홀로 항해하며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사랑에 도전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북태평양」에서는 원양어선 선원으로 시작하여 선장이 되기까지 파란만장하였던 작가의 자전적 생존기를 담고 있다. 「남서대서양」은 포클랜드 인근으로 출어한 원양어선의 조업 전개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고난과 모험 속에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려는 바다사람들의 희망과 절망의 서사를 통하여 인간 존재의 깊은 의미를 되새겨보게 하는 소설집이다.

[작품 평]
항해의 과정은 존재 확인이자 전환의 시간이다. 물의 물질성이 그러한 원초적 계기를 마련하고 그 강도를 부여하나, 현실 속에서 그것은 시련과 고난을 통해 이루어진다. 바다에서의 고난은 모험의 의미를 충족시키는 요건이다. 모험은 시련을 통해 한 단계 더 성숙한 존재로 고양되어 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윤길 소설들을 읽어보면 존재 성숙에 대한 갈망이 모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됨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갈망은 반드시 시련을 통해 그 강도와 적절성 여부를 시험받는다. 그렇기에 바다로 인해 등장하는 고난의 에피소드, 혹은 모험의 스릴은 이윤길 소설의 주제 형성을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할 구성 요소가 된다. (⋯) 위기와 그 위기를 통한 존재의 승화로서 신성의 획득은 모험의 궁극적 의미가 된다. 그것은 모두 존재의 승화와 맞물린 동일성의 회복을 가리킨다. 결핍이 주는 존재의 불모와 무의미로부터 존재의 생기와 의미를 획득함으로써 삶의 활기를 확보하였다는 뜻일 것이다. 이윤길에게 삶의 활성은 바다를 배경으로 한 시련과 그 시련의 극복이라는 모험의 발동에 놓여 있다.
―김경복(문학평론가) 작품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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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브사막풍뎅이의 생존법

저자:김서련 / 출판사:파란나무

작가 김서련은 <슬픈 바이러스> <폭력의 기원> <녹색 전갈> 이후 45일간 남미여행을 토대로 4번째 소설집을 펴낸다. 남미여행을 하면서 작가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모색했고 남미의 신비하고 경이로운 풍광과 그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이 책은 독자에게 페루 리마의 산동네와 마추픽추, 라구나 콜로라도 호수의 홍학, 파타고니아의 세자매봉,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 부에노스아이레스 콜론극장 등 남미를 여행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2019년 2월 14일 수요일 오전 7시쯤 작가는 리마 공항에 도착했다. 리마는 2월 13일 수요일이었다. 날짜변경선 가까이 있는 지역이라 한국보다 하루 늦은 시간이었다.
페루 리마!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서 가서 죽다’를 떠올리면서 짐을 찾고 여름옷으로 갈아입었다. 공항은 여름 복장과 겨울 복장이 뒤섞여 있었다. 일행들과 이국적인 그림이 있는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놀다가 승합차 두 대에 일행은 나눠타고 숙소로 향했다. 생각보다 거리는 낡았다. 건물들도 낡았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볼 때 시가지가 매우 정갈해 보이고 단아해 보였다. 대부분 벽돌집이라는 인솔자의 말을 듣고는 아주 아담하고 이쁜 거리를 상상했다. 페인트칠이 오래되어 낡은 냄새를 팍팍 주는 집들이고 빈집도 보이고 가게들도 허름했다. 공항 근처의 거리는 한 마디로 퇴색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황량하고 삭막했다.
45일 남미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리마 2일째는 리마 아르마스 광장과 주변의 구시가지를 둘러보고 산 크리스토발 언덕에 올라갔다. 전망대에서 본 것은 척박하고 삭막한 풍경이었다. 잿빛 산동네에는 푸른색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흙무덤인 듯한 산에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나미브사막 풍뎅이의 생존법>탄생했다.
<꽃분홍빛>은 칠레의 국립공원 토레스 델파이네에서 야영을 할 때 건너편 호텔에서 본 세자매봉을 물들인 연분홍빛이 만들어낸 소설이다. 살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그는 아내와 심각한 갈등으로 별거하고 파타고니아로 여행을 떠난다. 야영을 하면서 세자매봉을 감싸는 꽃분홍빛 아침 햇빛을 보고 그는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의 순수한 떨림을 떠올린다.
<태양의 문>은 페루의 마추픽추에서 태양의 문으로 가는 길이 배경이다. 꿈과 희망을 대해 말하고 있다. 마추픽추로 가는 길에 박의 부고 문자를 받은 주인공은 영화 대신 현실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영화의 길로 갔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따뜻한 질감의 색>은 2박 3일, 우유니에서 사막을 횡단하여 칠레로 가면서 본 풍경과 콜로라도 홍학을 배경으로 썼다. 나는 회사에서 상사와의 갈등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남미 여행을 떠난다. 지프를 타고 사막을 횡단하고 콜로라도 호수에서 홍학을 보면서 내면 밑바닥에 깔려 있는 감정의 선을 추적한다.
<내 생애 찬란한>는 아르헨티나 콜론극장의 ‘리골레토’ 오페라 공연을 보러 가는 길이 배경이다. 여행에서 길을 찾듯 나는 낯선 땅에서 길을 찾아가면서 자신의 삶을 찾아간다. 나는 숙소에서 혼자 콜론극장을 찾아간다. 낯선 도시에서 길을 찾는 것은 처음이다. 요양보호사로 노인에게 폭력을 당하면서 남편의 무언의 폭력을 인지하고는 분노한다. 그 대가로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한다. 길을 찾으면서 두려움의 정체를 인지한다.
<불의 땅> 지구의 끝에 있는 우수아이아에서 식어가는 열정을 되살린다. 경아는 남자친구에 대한 감정이 싸늘하게 식는 순간 나타난 뱀의 환영에 대해 이서정에게 말한다. 대화 끝에 경아는 모 작가의 그림을 표절한 기억을 떠올리고 그것이 줄곧 자신의 삶을 지배해온 것을 알게 된다.
작가는 여행을 했을 때의 지금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이처럼 일상을 떠난 여행은 자신이 처한 현실과 관계,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는 시간을 주고 앞으로의 삶을 모색하고 살아갈 힘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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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십니까

저자:전미홍 / 출판사:도화

전미홍 작가가 펴낸 두 번째 작품집으로, 한 여인과 그의 남편 이야기를 가족들의 다층적인 시점을 빌려 이야기하고 있는 연작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어느 정도 자전적 요소가 들어있지만 슬픔에는 침윤되어 있지 않다. 울분과 분노, 고통과 눈물의 수식이나 감정을 배제한 간결한 문체로 장애인(꼽추) 여인과 그의 가족 이야기를 핍진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야기를 단순하게 1인칭 단수가 아닌 가족이라는 복수의 화자로 끌어가면서 감정의 과잉 표현이나 주관적 표현 없이 인간세계의 현실을 객관성에 입각하여 포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삶의 굴곡을 들여다보는 작가의 깊이 있는 시선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온 부모세대에게 바치는 헌사, 그것이 이 소설이 가진 우선적인 의미일 것이다.
전미홍 작가의 연작소설 『누구십니까』의 세계가 설득력을 얻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사방이 막힌 세계를 사실적이면서도 구조적으로 파고들어 탐색의 깊이와 타당성을 얻고 있다. 특히 장애인이거나, 그로 인해 감당해야 하는 어둠이거나 벽이거나 하는 조건들의 가시화로 한 여인의 삶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가족들의 각기 다르면서도 복합적인 시선은 분위기나 사건을 순식간에 현장감 있게 살려내고, 그녀를 둘러싼 파편으로 존재하던 장면들을 한데 모으는 내적인 동력으로도 작용한다. 그래서 마침내 독자들로 하여금 이 소설을 그녀에 얽힌 온전한 하나의 서사로 기억하게 만드는 작가의 능력은 탁월하다.
유난히 힘겨운 시대를 견뎌온 부모세대의 고통과 상처가 무의식이나 의식의 깊은 곳에 은폐되었다가 의식 밖으로 끄집어져 나올 때 더욱 커지는 아픔을 작가는 연작소설 『누구십니까』를 통해 성실하고도 값지게 증언하고 있다.

「응시」는 이 연작소설 전체를 외피처럼 둘러싼 작품으로 화자인 M이 아트페어에 전시할 작품을 ‘돌, 점, 얀, 꽃, 소, 술, 모(母)’의 모티브로 작업을 하는 이야기이다. 이 연작소설에서 이 작품은 무엇보다 주목받을 가치가 있다. 그것은 M이 이성과 비이성, 실재와 환상, 의식과 무의식, 자기와 타인 사이, 그 경계의 흔적을 뭉개버린 공간을 캔버스에 올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서사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도 인과의 개연성을 바탕으로 세심한 부분의 사실성을 고려하면서 진행되어 오다가 문득 화자가 자신이 처해 있는 곳을 집중해 들여다보는 순간의 강렬한 에너지를 느끼게 하고 있다. 마치 M이 그림으로 표현하려고 하는 모티브처럼.
「그녀」에서의 화자는 숨기고 드러내지 않고 존재 자체를 부정해버린 꼽추 엄마의 기억을 소환한다. 그 기억의 시‧공간 속에서 자신을 둘러싼 고통의 근원, 원망의 근원, 죄의식의 근원들을 집요하게 파헤치는데, 그것이 없다면 현재의 자기로 있을 수 없기 때문임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아가신 후 오랫동안 잊었다고 믿었던 엄마가 하반신이 마비되고 실명해 방안을 기어 다니면서도, 혈액이 돌지 않아 심장 근육이 괴사하기 직전까지도, 친척이나 지인들의 안부를 묻고 그들의 어려운 처지를 걱정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스스로 잊히지 않은 것은 이렇게 되돌아온다는 것을 그 무엇보다도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표제작 「누구십니까」는 아내를 잃은 후 의욕상실에 시달리면서 딸을 몰라보는 섬망 증세에 시달리는 남자의 삶을 그리고 있는데, 이 남자는 꼽추 여자의 남편이다. 화자인 딸의 진지하고 차분한 서술과 정신과에 다니는 아버지의 진정성 있는 고백이 어우러져 한 인간이 현실적 맥락을 이탈해 무너져 내리는 현장을 정교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가 ‘누구십니까?’하고 질문할 수밖에 없다.
「아들아, 춤을 춰보아라」는 임종을 앞둔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호소이다. 화자인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과 아내가 받은 진짜 상처가 무엇이고, 어떤 외로움과 어떤 그리움이 그들을 괴롭혔던 것인지, 욕망의 얼굴과 그로 인한 유실과 망각을 돌아보고 그 고통의 질감을 다시 느끼게 한다. 그러면서도 아들의 엄살과 변명의 진심까지 살펴보게 만들어 상처와 고통을 섣불리 확정지어 인식하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식이 곤란한 자리를 우리들에게 떠맡겨 우리가 그 상처와 고통을 경험하게 만든다.
「5분 전」의 화자는 아내를 잃은 후 의욕상실에 시달리면서 딸을 몰라보는 섬망 증세에 시달리는 남자를 장인으로 모시고 살았던 사위 익도이다. 무용수인 아들이 재생불량성 빈혈이라는 희귀난치병에 걸리고, 장인 장례식을 치른 후 귀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 익도의 현재를 작가는 유머스러울 만큼 가벼우면서도 날카로운 간파력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작품이 주는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가 않다.
꼽추 할머니의 손녀가 화자인 「할머니는 코끼리를 탄다」는 별종의 한 세계를 풀어나가는 이야기의 서사가 독특하다. ‘명상센터, 진짜 주인, 코끼리와 할머니, 죽음의 유무, 인식의 전환, 선정삼매’로 짜여진 상상력은 현실감의 통제를 벗어난 세계를 떠돌면서도 이야기는 계시적이다. 그것이 약점으로 작용하지 않고 오히려 상상력의 두께를 키우고 있다. 할머니와 코끼리의 상황적 인과성을 현실감으로 채우지 않고 비유나 상징으로 표현해 세상에 붙박인 세상이 흔들리고 경계는 무너지고 풍경은 모호해진다. 그것은 발을 디딘 현실도 아니고 또 다른 세계도 아닌 어떤 공간이다. 그곳은 선정삼매에서 오는 기이하고 폭발적인 활력으로 인해 뻥 뚫린 공백 같은 곳으로 탈바꿈하는데, 이 모든 중심에는 화자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외할머니의 기억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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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의 마을

저자:이정임 / 출판사:걷는사람

『도망자의 마을』에서 작가는 열심히 살수록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불편하고 고단해지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주체들을 선보인다. 이들 모두가 우리 곁에 숨 쉬는 이웃이요 바로 나 자신 같다. 백수가 되어 가난한 산동네에 살면서 치매 걸린 엄마의 요양병원비를 감당해야 하는 나(「오르내리」), 부지기수로 사기를 당한 아버지를 둔 덕분에 버는 돈을 모두 빚을 갚는 데 써야 하는 수현(「도망자의 마을」), 과로와 스트레스로 각종 지병을 안고 있지만 직장에서 병가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는 나(「점점 작아지는」), 신장 투석을 해야 하는 홀어머니와 사는 프리랜서 비혼주의자 수안(「뽑기의 달인」), 서로에게 안정감을 느끼며 함께하는 무직 비혼주의자 고무와 호양(「벽, 난로」), 치매에 걸린 엄마가 나날이 변해 가는 모습을 맞닥뜨리며 두려워하는 이선(「비로소, 사람」)이 그들이다.
해설을 쓴 장예원 평론가가 강조한 것처럼 이정임의 소설은 “모두가 〈달려라 하니〉의 하니처럼 앞만 보고 달리지 않아도, 달리기 순위 안에 들지 않아도, 서로가 곁을 내주는 ‘작은’ 벗이 되어 주기만 한다면 잠시나마 ‘고독한 자아의 피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비록 그들이 세상의 기준에서는 있으면서도 없는 구름 같은 존재들일지라도” 말이다.
물론 소설 속 인물들은 그들이 처한 답답한 현실을 인식하고 있기에 다소 지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집 『도망자의 마을』의 주체들은 고달픈 장면들을 응시하며 그 안에 가득한 고통을 들이마시면서도 비관에 빠져 있지만은 않다. 오히려 이정임의 소설에서는 삶의 고달픔 속에서도 특유의 명랑성이 느껴지는데, 그것이 곧 암담한 현실을 적절한 경계와 한정으로 형식화하는 이정임만의 “예술적 능력”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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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위버멘쉬

저자:신호철 / 출판사:문이당

201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문어」로 등단한 신호철의 첫 장편소설 『호모위버멘쉬』가 출간되었다. 작가는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뒤늦게 양자역학에 관심을 가졌고, 그 속에서 문학적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점차 다양해지고 있는 문학 장르에서, 생명과학이라는 필터가 가미된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느낌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호모위버멘쉬』는 인간이 성취한 무수한 가능성 일부를 끄집어낸 이야기다. 인간이 장차 어떻게 변모할지, 변한다면 그것을 과연 진화라고 할 수 있을지, 진화의 방향은 오직 번성으로만 향하는 건지, 그게 아니라면 어떤 최종적 목적을 가졌는지에 관한 호기심이기도 하다.
채신과 비슷한 증상의 환자들이 폭증하고 있었다. 지난주부터 갑작스레 일어난 변괴였다. 발병자 추세는 병원에서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뉴스에서는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 중국 등지에서도 발생하고 있다고 떠들어댔다. 질병관리본부에서 긴급 역학조사에 돌입했다는 멘트 끝에 공항 입국자 체온을 검사하는 장면도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평범한 전염병이 아니다. TV에서는 ‘코로나’나 유행성 독감이 아니라 ‘루푸스’라는 자가면역질환에 가깝다는 의사 인터뷰를 방영했다.
- 본문 중에서
인간은 진화되고 있다. 누군가 그렇게 평가한다면, 진화된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진화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인간성은 어떤 형태이어야 할까? 철학자 니체는 극복한 인간에게 ‘위버멘쉬’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성이라는 단어조차 제대로 정의할 수 없다. 그렇게 전 세계를 공포의 시대로 몰아넣었던 펜데믹 시대를 거쳐 AI 시대를 맞이했다. 기발하고 미래지향적인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는 시대이기도 하다. 에덴스피어는 인류의 미래를 변화시킬 인공생태 실험장이다. 미래의 먹거리인 인공배양육은 상상 속의 음식이 아니라 실제로 전 세계의 생명공학 과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는 분야이며 실제 고기처럼 마블링까지 살아있는 배양육을 생산해 내고 있다. 우리가 늘 먹는 육류뿐만 아니라 과일이나 채소까지 식물배양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인간은 늘 필연을 추구하면서 우연을 기대했고, 근원을 아는 욕망에도 기꺼이 굴복했었다.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이기적이었고, 현명하면서 모순덩어리였다. 한마디로 어떤 단어로도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인간에 관한 이야기는 나 자신의 색깔을 혼자 규정해야 하는 일처럼 재미없고 공허할지 모른다.『호모위버멘쉬』는 인간이 성취한 무수한 가능성 일부를 끄집어낸 이야기다. 인간이 장차 어떻게 변모할지, 변한다면 그것을 과연 진화라고 할 수 있을지, 진화의 방향은 오직 번성으로만 향하는 건지, 그게 아니라면 어떤 최종적 목적을 가졌는지에 관한 호기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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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월: 다시 환상을 꿈꾸다

저자:최정희 / 출판사:전망

최정희 소설가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첫 소설집에서 주인공인 여성 화자의 목소리가 두드러졌다면, 이번 소설집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등장한다. 노년의 삶을 핍진하게 그려내고 있는 「능소화 필 때」를 비롯하여, 「신월新月 - 다시 환상을 꿈꾸다」에서는 고아라는 출신과 안락사 문제를 소설의 배경이 되는 유럽의 역사와 더불어 성찰하고 있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지만,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작별의 시간이 주어지며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는 단편이다. 「신월新月 - 다른 이야기」는 사업 실패 후 백수로 살아가는 남편과 가족 부양을 위해 택시 운전을 하는 여자의 삶을 그리고 있으며, 「반짝이던 동전」은 연탄 공장 인근의 판자촌 마을을 배경으로 주인공이 어린 시절 겪은 사건과 현재 마을의 개발과정에 얽혀 일어나는 사건을 연결하여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바라춤」은 보도연맹사건을 배경으로 70여 년 전 희생자였던 한 할아버지의 삶에서 그의 손자에 이르는 가족사를 통한 굴곡진 역사를 다루고 있고, 「구름바다, 모래성」은 해운대를 배경으로 설화와 현실을 오가며 어려웠던 서민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작가는 이렇게 역사적 시공간 속에 놓여 있는 다양한 인물들의 서사를 통하여 인간 삶의 의미, 더 나아가 공동체적 삶의 윤리적 역사적 의미까지 짚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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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가 만난 지구

저자:고금란 / 출판사:호밀밭

전염병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어느 봄날 새벽, 우주선 천마호를 타고 온 호세가 간월산 정상에 나타난다. 우주인들의 지령을 받은 그는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세 개의 열쇠를 구해 21일 만에 떠나야 한다.
호세의 열쇠 찾기 행로에는 수정마을에 사는 한별이를 비롯해 인디 가수이자 환경운동가인 곡두, 고택을 복원하는 데 모든 것을 건 재우, 금줄개구리 지킴이 지우 스님, 철학관 주인 부산댁, 비단벌레 지킴이 손씨가 함께한다.
손씨가 발견한 수로를 통해 동해 수중왕릉으로 들어간 호세와 한별이는 해룡이 된 문무왕을 만나고 옥룡 목걸이를 얻는다. 이어서 호세는 참새와 여왕개미들의 공조 작전으로 천전리 각석 절벽 밑에 있는, 공룡 화석을 손에 넣는다. 그리고 마침내 구형왕릉에서 지우 스님과 부산댁이 구해온 운석을 건네받는 것으로 세 개의 열쇠 찾기 임무를 완수한다. 한편, 역할을 완수한 호세는 날이 어두워지자 천마호를 타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서는데….
『케플러가 만난 지구』는 신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사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흐름 속에서 환경 보호와 생태계 보전의 메시지를 곳곳에 심은 장편소설이자, 산문집과 소설집을 주로 펴낸 70대 여성 작가의 손끝에서 탄생한 첫 SF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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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와 불개미

저자:정혜경 / 출판사:전망

「개미와 불개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쓰나미에 쓸려가는 것만큼이나 감당하기 어려운 악재와 마주하고 있다. 가진 것 없어 구차하고 신산스럽지만, 그래서 희망이 없다고들 말하고 있는 자리에서 있지만, 그들은 기어이 꿈을 꾼다. 용접공과 무속인의 죽음, 거문고 연주자, 학교 폭력, 지적 장애를 가진 이의 마음의 무늬 등 껍데기만 말할 뿐 진실을 보여주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가 외면한 삶의 속살, 마음의 무늬를 그리고 있다.
표제작 「개미와 불개미」는 개미처럼 힘없는 이들이, 어떻게 타자화되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티끌 같은 개미들이 수없이 밟혀나가면서도 땅속 개미집과 조직력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졌을 때도 벌과 함께 살아남은 것처럼, 사악한 이들의 탐욕만큼이나 가진 것 없는 이들의 연대가 지니는 더 큰 희망의 빛을 그리고 있다.
「주인 없는 집」은 한 무속인의 삶과 죽음을 통해 비빌 언덕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무속인이라는 특별한 삶을 영위했기에 접할 수 있었던 수많은 인간 군상을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한 품위 있는 마무리의 의미를 그리고 있다.
「검은 현」은 거문고 연주자의 삶에 들이닥친 낯선 방문객과도 같은 늪에서도 예술혼을 불태움으로써 기어이 극복해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깊고 푸른 잠」은 이기심에 눈이 멀어 첫 단추를 잘못 여민 주인공이 30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자신의 오판을 깨닫게 되고, 참담한 절망의 시간을 맞이하는 마음속 여정을 그리고 있다.
「안단테 안단테」는 눈 깜짝할 사이에 어마어마한 변모를 감당해야 하는 이 세상에서 느리게, 세세히 보아야 알게 되는 것들에 대해 그리고 있다. 마치 공기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살게 하는 것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반드시 존재함을, 만 오천 번을 외워야만 익혀지는 특별한 시간을 살다 간 지적 장애아이의 삶을 통해 그리고 있다.
「승진의 하루」, 「하이드의 마지막 선물」에서는 삶의 쓸쓸한 뒤 안에서 무상함을 맛보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삶의 무늬라는 사실을 주인공들의 비극적 결말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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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니 숲의 휘파람새

저자:장미영 / 출판사:산지니

‘말하지 않음’, ‘말해지지 않음’의 가장자리에 맴돌고 있는 진실은 무엇일까? 등단 이후 꾸준히 현대인의 모순된 심리와 사람 사이의 관계를 탐색해온 장미영 소설가가 첫 소설집 『사려니 숲의 휘파람새』를 출간했다.
“7편의 소설들은 ‘말함과 말하지 않음’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진실과 거짓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오현석 문학연구자는 해설 「언어의 가장자리에 머무르는 진실들」을 통해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의 독자들을 끊임없이 진실과 거짓 판단을 해야 할 심판대에 올려서 시험하고 있다”며 소설을 상찬한다.
저자는 일곱 편의 작품을 통해 자기 자신, 또는 타인과의 사이에서 이유 모를 혼란과 관계 변화를 겪는 현대인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린다. 막막한 현실 속에서도 꿈을 좇기를 시도하며 타인과 연결되려 하는 청년,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기억으로 인해 혼란을 느끼는 가족, 진실을 사실대로 밝히지 않음으로써 남을 기만하는 인물들. 『사려니 숲의 휘파람새』에 실린 단편을 통해 독자들은 선과 악이라는 윤리적 경계를 넘나들며 진실과 거짓은 어떻게 나뉘는 것인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 무기력한 현실 속 자신의 꿈을 좇는 청년들
표제작 「사려니 숲의 휘파람새」의 주인공 지웅은 남들보다 소리에 민감해 작은 소리까지 구분할 수 있다.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며 하루하루 무기력한 삶을 살던 지웅에게는 좋아하던 휘파람새 소리를 들으러 길을 떠났다 생을 마감한 아버지의 기억만이 강렬하게 남아 있을 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추구할 의지도 열정도 없다. 어느 날 지웅이 사는 빌라에 한 여자가 이사 온다. 여자의 집에서 나는 작은 소리에도 귀 기울이며, 지웅은 그녀에 대한 궁금증을 키워간다.

꽃, 동물, 새, 모든 것들은 말이야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거짓이 없다는 거야.(64쪽)

「그룹 헤로인」은 예술과 사랑의 경계에 선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다. 김준은 예술을 통해 진짜 나를 찾고 싶어 하는 청년이다. 자신이 속해 있는 밴드 ‘헤로인’의 리더 병화 형을 예술가로서 존경하는 준은 어느 날 자신의 여자친구 가인과 병화 형의 불륜 장면을 목격한다. 하지만 준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주변 관계를 정리하고 진정 자신이 원하는 예술을 찾아 병화 형의 집으로 향한다.

✏ 거짓은 어떻게 진실이 되는가

「거짓말의 기원」은 최근 대두되고 있는 교사와 학부모 간의 갈등을 다룬 소설이다. 민서 엄마는 민서 귀의 상처를 이유로 어린이집 담임 선생님인 주인공에게 어린이집 운영과 관리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CCTV를 통해 아무 일이 없었음을 확인했는데도 민서 엄마는 지속적인 민원 제기와 함께 어린이집 홈페이지에 글을 쓰고 주인공을 고소하기에 이른다.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과 상담까지 받게 되는 주인공은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점점 지쳐간다.

「타로텔러」는 미래를 예견하는 무당 엄마의 능력을 이어받았지만 신내림을 거부하고 타로텔러로 살아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다.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타인의 미래를 볼 수 있는 그녀는 타로점을 보러 온 손님을 큰 위험으로부터 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숨긴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끊임없이 거부하지만,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우리 동네 현보」에는 상반되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늘 웃고 다니는 말더듬이 현보는 동네 사람들의 구박을 받는 인물이다. 현보의 동생 현수는 형과 달리 똑똑하고 합리적인 인물이다. 동네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현보의 말에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고 현수의 말에는 적극 동조한다. 현수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이용하여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형에게 뒤집어씌운다. 주인공 연희는 현보와 현수를 통해 사실이 아님에도 진실이 되고 사실임에도 거짓이 되는 현실을 목격하고 절망한다.

사실과 진실 사이 거리는 얼마나 될까. 사실이라도 믿어 주지 않으면 거짓이 된다. 하지만 거짓이라도 믿어 버리면 곧 진실이 된다. 믿어 주지 않는 진실, 믿어 버린 거짓.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233쪽)

✏ 웅크리고 있던 기억의 파편을 대면할 때

「끝나지 않은 약속」의 주인공 진수는 딸 채영을 홀로 키우며 지낸다. 아내 수진은 채영을 낳고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채영은 태어나서 한 번도 엄마를 본 적 없다. 분명 채영의 기억에 엄마는 없는데 어느 날부터 채영은 자꾸 생전 수진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은 아줌마 이야기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줌마와 대화하고 선물을 받고, 수진과 진수가 살았던 돌산마을을 찾아가기도 한다. 진수는 채영을 통해 피하려 했던 과거 수진의 기억과 마주한다.

오늘이 그날인 것 같다. 수진에 대해 이야기를 해 줘야 할 시간이 왔다.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서랍에서 수진과 나의 손수건을 꺼내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채영이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나는 채영이를 목말 태웠다.(104-105쪽)

「붉은 벽돌집」은 해리성 무감각증을 진단받고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단절된 채 삶을 살아가는 청년의 이야기다. 청소 일을 하는 준상은 붉은 벽돌집의 청소를 맡는다. 가출 청소년들이 어지럽힌 벽돌집 안에서 준상은 남겨진 물건들을 보고 갑작스러운 과거의 기억을 마주한다. 수많은 장면으로 인과성 없이 쪼개진 기억은 선후관계도, 원인과 결과도 없다. 의식 곳곳에 박힌 기억은 시시때때로 준상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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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의 천국

저자:김옥숙 / 출판사:산지니

▶ 비대면과 익명성, 그 달콤한 가면 뒤에 숨은 악마.
홀 장사 매출이 떨어지자 배달 장사에 뛰어든 식당사장 만석. 배달 시스템이 가진 비대면이라는 특성상 진상손님이 전에 비해 훨씬 늘어 골치 아프다. 툭하면 “환불해 주세요”, “리뷰에 올릴 거예요”라며 ‘리뷰 갑질’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환불도 해 주고, 사과도 해 줘야 별점 테러를 막을 수 있으니 참는 수밖에.
배달 주문으로 이어지기까지 그 식당의 리뷰는 굉장히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구매자는 배달 앱 리뷰를 확인한 후 평점이 높고 리뷰가 좋은 식당을 선별해 주문을 하니, 만석도 여느 자영업자와 마찬가지로 리뷰 관리에 온종일 전전긍긍이다. 리뷰어는 바로 이 점을 악용한다. 평점 떨어지는 것이 두려워 리뷰 관리에 공을 들이는 식당사장을 노리고 익명의 리뷰어들은 별점 테러를 저지르며 식당사장에게 ‘왕’으로 군림하려는 악랄한 심보를 보이는 것이다. 배달 앱에서 구매자는 닉네임을 사용해 리뷰를 단다. 이들이 식당에 근거 없는 악플을 달며 활개치고 다녀도 이를 제재할 수 있는 방도가 없다. 닉네임, 익명이라는 가면 뒤 악플러가 휘두르는 폭력에 식당주인은 그저 당하고 있을 뿐이다.
코로나 시대 이전에도 악플러는 존재했고, 이 악플러는 누군가를 울리고 또 죽였다. 하지만 유례없는 전염병의 유행으로 우리 사회는 누군가와 거리를 두고, 최소한의 접촉만 허용하는 문화에 길들여져 갔다. 이렇듯 ‘비대면 친화적’인 일상의 도래는 그 비대면의 특성을 이용한 더 많은 악마를 키우기에 이르렀다.

▶ 약자와 약자가 벌이는 일상의 각개 전투
외출도, 샤워도 삼간 채 하루 종일 집 안에서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고 배달 음식 시켜 먹는 것이 낙인 은둔자 민성. 민성은 배달 앱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그 음식을 먹는 과정이 너무나 즐겁다. 그리고 무언가 불만이 생겼을 때 그 식당에 리뷰로 갑질하는 것은 더 즐겁다. 허위로, 과장해 인신공격까지 해 대는 이 리뷰는 악플이다. 민성이 아무리 심한 악플을 달아도 대부분의 식당사장은 되레 민성에게 죄송하다고 한다. 태어나 처음 느껴 보는 권력을 가진 자의 기분. 누군가의 위에 있다는 기분. 이 짜릿함에 민성은 ‘악플 게임’을 멈추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이 민성으로 하여금 ‘프로 악플러’가 되도록 만든 것일까.

민성에게 학교는 정글이었고 지옥이었다. 아이들은 살찐 민성을 보기만 하면 돼지라고 놀렸다. 여럿이 둘러싸고 민성을 이유 없이 때렸다. (중략) 민성은 그 자리에 선 채로 바지에 오줌을 지렸다. (중략) 엄마는 민성의 축축한 바지를 보고 아무것도 묻지 않고 대뜸 등짝을 후려쳤다. 엄마는 이게 과연 내 새끼가 맞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민성은 엄마가 등짝을 세게 후려쳤을 때, 엄마에게도 외면당한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 그날, 민성의 어린 영혼은 유리컵처럼 깨지고 말았다. _p. 116~118

민성은 유년 시절, 학교폭력의 피해자였고 집에서는 엄마의 차별과 힐난에 시달렸다. 수치스러운 경험을 당하고 그것을 제대로 위로받지 못한 채 어른이 된 민성. 원망, 분노, 열등감이라는 감정의 복합체는 어느새 괴물이 되어 무고한 이에게 그 감정을 표출하는 악마가 되고 말았다.

노동운동가에서 자영업자로 변신한 선호 형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이 나라는 자영업자를 위한 나라가 아니야. 자영업자를 위한 나라는 없어. 어쩌면 자영업자를 위한 나라가 없기 때문에 이 가게 이름을 그리운 나라로 지은 건지도 몰랐다. _p. 78

20대 시절, 만석과 함께 자동자 부품공장에서 근무하며 친해진 선호는 당시 공장이 폐업하게 되자 폐업반대 투쟁을 이끈 공장 노조위원장이었다. 이후 호프집을 열어 장사를 시작했고, 이 가게는 대학로의 핫플레이스로 자리매김했지만 그 역시 코로나의 직격탄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가게와 직원의 규모를 줄이며 고군분투했으나 점점 더 어려워지는 주머니 사정에 선호는 직접 배달 라이더가 되어 배달을 다닌다. 입버릇처럼 “자영업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고 말하는 선호에게서 우리 사회 수많은 자영업자가 외치는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부익부 빈익빈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무한경쟁 시스템은 결코 약자를 뒤돌아보지 않는다. 약자는 각자도생으로 마주한 정글을 탈출하여 살아남기 위해 생존 전투를 벌일 뿐. 서로가 서로를 베고 도려내고 후벼 파는 이 전투는 낙오하지 않기 위한 저마다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 플랫폼 자본주의 작동 방식의 명과 암
휴대폰에 배달 앱을 다운받지 않은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 배달 앱은 우리의 일상으로 스며들었다. 배달 앱과 배달 대행 플랫폼의 발달은 바쁜 현대인에게 빛이 된 동시에 우리 사회의 어둠으로 자리 잡았다. 당일배송, 새벽배송, 총알배송…. 24시간 쉼 없이 돌아가는 배달 서비스. 배달되는 물건의 종류는 커피 한 잔에서부터 무거운 가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배달 안 되는 게 없는 신세계에서 살고 있는 지금. 하지만 플랫폼 서비스가 제공하는 편리성 이면에는 그 편리를 위해 땀 흘리며 죽어 가는 노동자가 있다.
배달 앱과 같은 플랫폼은 고객의 정보를 데이터로 저장하고, 여기에 노동자를 끌어들인다. 그러고는 고객과 노동자를 연결해 줌으로써 이익을 얻는다. 플랫폼에는 무수한 데이터가 이미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보다 많은 고객과 연결되기 위해 자영업자는 이 플랫폼을 거치는 방법을 택한다. 자영업자는 플랫폼에 직접 고용된 것은 아니지만, 마치 구속된 것처럼 그 안에서 자신의 시간과 노동을 쏟는다. 플랫폼의 작동 방식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착취의 굴레를 쓰는 것이다.
이제 플랫폼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거대 공룡이 되었다. 『배달의 천국』에는 영세 자영업자를 착취의 구조로 밀어 넣는 이 플랫폼 자본주의의 어둠과 잠깐 기댈 벽조차 빼앗겨 버린 사회 약자의 초상이 함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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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밍스쿨

저자:박혜영 / 출판사:아시아

사랑이 궁금하지 않는 세대,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 시대의 거짓말 같은 공간
예비 신부 학교 ‘차밍스쿨’

제4회 혼불문학상을 수상한 박혜영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 『차밍스쿨』. 예비 신부들을 위한 기숙 학교라는 가상의 공간 ‘차밍스쿨’을 내세워 현대의 성과 사랑, 결혼관 등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능수능란하게 펼쳐낸다.
‘도로시’는 오랫동안 왕래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뜻밖에 큰 유산을 상속받게 되고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구상하던 중 ‘차밍스쿨’의 밑그림을 그리게 된다.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위해 뭔가 해보고” 싶다는 마음은 “세상의 모든 커플들이 행복해지는 일”을 하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진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첫 번째 교육생 7명을 받아 문을 여는 것에서부터 『차밍스쿨』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랑은 후회 없이 목숨 거는 거고 결혼은 후회하며 목숨을 이어가는 겁니다”
대담하고 신랄하게 사랑과 성, 결혼의 민낯을 이야기하는 사랑학 강의
솔직하고 통쾌한 여성들의 성장 서사

차밍스쿨에 입교한 일곱 사람, 유지원, 윤세라, 김보람, 김윤영, 허미리, 임슬기, 소시은은 저마다의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차밍스쿨에 괜찮은 신붓감이 있는지를 탐색해줬으면 좋겠다는 중매쟁이에게 고용되어 온 아르바이트생, 적극적으로 차밍스쿨의 설립 취지에 감화되어 부모를 설득해 입교한 사람, 본인은 원하지 않았지만 가족들의 등쌀에 시달리다 들어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쓰고 싶은 소설의 소재를 찾으려고 들어온 작가지망생도 있다. 다양한 개성과 욕망을 지닌 사람들이 한데 어울리게 되면서 사랑과 결혼에 대한 가치관도 조금씩 변화하고, 저마다의 삶도 예상하지 못했던 국면을 맞게 된다.

차밍스쿨은 결혼을 앞둔 이들만이 아니라 결혼을 이어가고 있는 이들에게도 메시지를 전한다. 입교생들은 규정상 그들의 어머니와 함께 수업을 듣는다. 어머니들은 그 수업을 통해 자녀들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받아들이는가 하면 억지로 이어온 자신의 결혼생활도 돌아보게 된다.

박혜영 소설가는 작가의 말에서 “『차밍스쿨』은 이 시대의 결혼문화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 관한 이야기”라고 쓰고 있다. 연애도 결혼도 녹록지 않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남김없이 사랑하며 살아가자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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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망루

저자:배이유 / 출판사:알렙

망루에 한번 올라오면 다음 주자가 정해질 때까지
아래로 내려가 땅을 밟을 수 없었다. 그게 파수꾼의 운명이었다.
표제작 「밤의 망루」는, 작가가 프란츠 카프카의 『성(城)』을 오래 마음속에 어떤 이미지로 품고 있다가 쓴 소설이다. 「밤의 망루」에서는 고독한 망루에 홀로 서서 거대한 성을 지키는 파수꾼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임무를 안은 채, 어떤 지시가 내려질 때까지 홀로 성을 지켜야만 한다. 작가는 이를 두고 “불가항력의 본연적 임무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작가는 “아무것도 없는 빈 땅, 안개로 휩싸인 적막한 공간에 발을 딛으며 헤맸다. 오리무중. 추상에서 구체화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시간이 걸렸다”고 술회한다. 매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상을 반복하던 파수꾼의 삶은, 한 여인의 등장으로, 그리고 그녀의 탈주로 요동치게 된다. 파수꾼과 같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던 그녀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리고 그런 그녀가 파수꾼에게 남긴 것은 과연 무엇인가. 망루 위의 파수꾼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네 인생의 마무리는 멋지게 환상적으로 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 자, 들어봐.”
작품집의 문을 여는 「검은 붓꽃」은 몸의 소리를 애써 부정하고 가두려던 시대의 이야기이자, 그런 시대를 살아온 한 여성의 모습을 담은 소설이다.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고, 무엇보다 두려워하던 그녀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성기를 들여다보게 된다. “깊숙이 감춰진 성기를 드러내어 똑바로 바라보긴 처음이었다.” 작가는 한 사람 안에 고착된 고정 관념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전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의 관습적인 시선을 자기 것으로 내면화해서 그것을 실체라고 믿는 오류를 저지른다. 특히 그동안 여성들은 자기 신체의 주인 노릇을 못한 경우가 많았다. 작가는 질문한다. 과연 지금은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서 살고 있느냐고.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하루를 선물하는 건 어때요.
작품집의 두 번째 이야기, 「홍천」은 어느 해 여름, 장의차처럼 검은 차를 탄 네 사람의 모습을 그린다. 그날 서로 처음 본 그들은 강원도 홍천으로 가는 차에 동승했다. 과연 그들은 왜 홍천으로 가는가. 작가는 언젠가 홍천에 가본 적이 있는데, 그곳에 가기 전부터 어떤 정보도 없었음에도 ‘홍천’이란 장소로 소설을 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곳을 둘러보며 어떤 이야기가 자신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왔다고 회고한다. 마치 이야기가 “물 흐르듯이 내 안에서 흘러나와 소설 속 주인공들이 알아서 자기 길을 만들어 간 것이다.”

이순은 발가락 낱낱을 떼어 움직여주었다. 너희를 덩어리가 아닌 개별적 인격체로 존중할게.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는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여도 속으로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부부, 조금 더 정확히는 상운의 아내 ‘이순’의 이야기이다. 한때는 그들에게도 “서로의 심장에도 반짝하고 불이 켜지던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이순과 상운은 “각자 다른 별”이 되었을 뿐이다. 어느 날 상운이 이순을 위한 선물로 사들고 온 어항 속 물고기를 보는 것이, 이순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넓지도 않은 집 안에서 이순은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잃”고, “갈 곳이 없다”고 느낀다. 오랫동안 살아온 부부 사이라 해도 가장 가까이 밀착해서 산다 해도 서로의 마음속을 잘 들여다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눈치조차 못 채는 경우도 있다. 너무나 다른 성향이나 생각을 갖고 있으므로 어느 한쪽이 인내하지 않으면 가정을 건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작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물밑의 가라앉은 속말을 들여다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착하다, 천사 같다, 자애롭다, 자비롭다’ 같은 칭송 뒤에 가려진 불편함, 거북함.

지금도 순간순간 사라지고 있어.
코로나 시대, 점점 더 삭막해지는 사회 분위기와 단절된 관계 속에서 그래도 버틸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작가는, 그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고 말한다. 「옛날에 농담이 있었어」에는 그런 작가의 생각이 투영되어 있다. ‘경’과 ‘나’가 나누는 대화, 농담과 서로를 향한 시선, 마음. 그 속에서 우리는 모든 게 너무 빠르게 일회용품처럼 소비되고 버려져 ‘옛것’이라는 창고 혹은 ‘낡음’, ‘쓸모없음’이라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가 박제되는 고도로 디지털화되고 스피디하게 전환되는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작고 연약한 것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꿈틀거리는 생명력, 야생성, 자유를 향한 갈망을 엿보게 된다.

모든 것들은 소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2022년 제27회 부산소설문학상 수상작, 「소리와 흐름: 록의 부치지 못한 노래」는 상실한 것에 대한 그리움, 이별과 만남의 우연과 필연, 이어짐과 끊어짐의 반복, 영원과 순간. 찰나의 스침같이 반짝이다 스러지는 것들에 대한 록의 헌사이다. 실험적인 문체의 변화와 파격을 시도해 하나의 아름다운 화성의 울림으로 다가가고 싶었던 작가는, “누구에게나 있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을 밀도 있는 문장으로 그려 냈다. 가볍게 문장을 끊어버리는 콤마들, 단어의 무수한 반복, 그러는 순간 갑자기 길게 이어지는 문장들은 짧은 들숨과 긴 날숨이라는 상처의 호흡법을 매력적으로 형상화했다. 이 작품은 마음이 가난한 시대, 우리에게는 어쩌면 실종된 누군가가 필요하며, 실종의 그리움이 우리를 견디게 한다는 성찰의 지점을 선사한다.”(심사위원 유익서·박향·권유리야)

시간은 흘러간 게 아니라 어딘가에 스며 있다 불쑥 나타난다.
시간은 사라지는 게 아니다.
「멈춘다 흐른다」는 얼핏 보면 전혀 연관성 없는 장면들을 갖다 붙인 듯한, ‘파편적 구성’을 취한다. 출근길 위를 흐르다 멈추다 하던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토끼, 도로로 뛰어든 흰 고양이를 본다. 눈을 감았다 뜨는 찰나의 순간, 꿈도 아닌 어떤 장면이 스르륵 펼쳐지는 것을 경험한다. 과거에 바라본 풍경과 현재의 순간이 연결되고, 과거의 기억이 침투한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 현실과 가상, 지금 이 순간과 저 순간이 교차한다.
그렇게 작가는 “시간의 조각배에서 흔들리는 삶의 파편들”을 그려 낸다. 누구나 한 번쯤 “삶은 순간이고 허깨비” 같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장소, 현재라는 시간, 만져지는 감촉이 실체인지, 실재하는지 의심하고 혼란스러워 한다. 작가는 “그런 느낌을 동시성의 공간에서 펼쳐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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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빛

저자:정영선 / 출판사:강

『아무것도 아닌 빛』의 무대는 도시 주변부이고 주된 등장인물도 노년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산의 외곽 끝자락인 낙동강 유역 ‘은곡’의 서민아파트 단지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90세를 전후한 연치의 남녀 노인을 중심에 두고 이들과 연관한 여러 인물을 주위에 배치하고 있다. 시간도 팬데믹에 처한 최근 몇 년 동안이다. 노년의 삶이 그렇듯이 단조로운 일상의 사건들이 펼쳐진다. 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며 그 아래 각기 복잡다단한 개인사가 내장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우연하지 않게 같은 아파트 단지에 모여 살게 된 오랜 인연을 지닌 사람들의 관계를 추적한다. 이들은 예외적일 만큼 사회적 약자 혹은 소수자에 해당하는 사람들로서 주변부 서민아파트로 모여들었기에 그 만남이 자연스럽다.

작가는 텍스트의 입구에서 “신불산 유격대 활동과 사상범의 수감 생활은 『신불산?빨치산 구연철 생애사』”를 참조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창작의 계기가 실존 인물과 연관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줄곧 ‘구연철’에서 비롯한 ‘안재석’을 일인칭 주인공으로 극화하여 서술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물론 실재와 허구,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일은 소설의 특권이므로 텍스트 해석에서 ‘구연철의 생애사’는 하나의 참조 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먼저 텍스트를 진행하는 동력인 플롯을 찾으면 이 소설을 구성하는 큰 뼈대가 남녀 두 노인의 ‘특이한 사랑’ 이야기임을 알게 된다. 빨치산으로 신불산에서 활동하다 휴전 이후에 체포되어 삼십 년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안재석과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조향자’는 서로 친밀한 관계가 아니다. 전쟁이 나기 전의 도피 과정에서 수정동에서 안재석이 조향자를 두 번 만나지만 안재석이 기억하는 만큼 조향자는 그를 인지하지 못한다.

소설의 결말에서 보듯이 다수의 도피자가 수정동의 조향자 집을 은신처로 삼았으니 숨겨주는 이보다 숨는 이의 절박한 마음이 더 오래 남았고, 안재석이 감옥에서 고문에 못 이겨 조향자를 아내라고 둘러댄 부채감과 죄의식도 기억을 고착한다. 따라서 ‘사랑 이야기’는 플롯의 유형을 규정하는 측면에 불과할 수도 있다. 오히려 둘의 다른 기억과 마음에 기반한 성격의 차이를 먼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은곡에서의 만남에서 잘 드러난다. 안재석이 육십 년도 더 된 과거를 생각하며 조향자가 사는 이곳으로 이주한 행위와 달리 조향자는 그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소설은 두 사람이 만드는 사건의 치열함이 아니라 두 사람을 나란히 병치하는 방법을 선택하면서 성격화하고 이들과 연관한 인물들을 드나들게 만든다.

어떤 의미에서 이 소설에서 굳이 인물의 경중을 따진다면 조향자에 더 무게가 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안재석이 한 시대의 행위자였다면 조향자는 어두운 고난의 시대를 고스란히 품고 산 인물이다. 2부 ‘여든 살의 독서모임’은 조향자를 주 인물로 내세워 서술하는데 이 지점에서 전체 서술에서 시점의 교차를 확인할 필요를 느낀다. 이미 말한 대로 1부 ‘누가 말했는가’ 1~4장은 일인칭 전지의 안재석 시점이고 2부 ‘여든 살의 독서모임’ 1~4장은 삼인칭 전지의 조향자 시점이다. 1부와 2부를 보면 확실히 안재석과 조향자를 병립하려는 서술 의도가 분명하다. 그런데 3부 ‘지금, 여기’는 1장을 일인칭 전지의 류정일 시점으로, 2장을 일인칭 전지의 안재석 시점으로 서술하여 류정일과 안재석이 각기 자기를 말하게 한다. 다시 4부 ‘죽기 전에 해야 할 일’ 1~3장은 삼인칭 전지의 조향자 시점으로 돌아오고, 마지막 5부 ‘기억의 주름’은 1~3장을 일인칭 전지의 안재석 시점으로, 4장을 삼인칭 전지의 조향자 시점으로 마감한다.

우선 외적 형식으로 보더라도 이 소설에서 안재석과 조향자가 주요하고 이들의 사이에 류정일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또한 남성 인물을 일인칭 주인공 서술자로 극화한 반면 여성 인물은 서술 대상으로 삼았다. 이는 안재석의 정동을 따라서 서술하려는 작가의 의도와 연관한다. 그 마음의 중력이 조향자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길고 긴 생애의 우여곡절이 품고 있는 많은 수수께끼에 대한 답은 5부 ‘기억의 주름’에서 제시되며 특히 마지막 3장을 통하여 조향자의 시점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점에서도 이 텍스트가 지닌 기억과 욕망의 역학은 능동적 인물인 안재석을 수동적 인물인 조향자가 감싸 안는 형국이다.

2부 ‘여든 살의 독서모임’의 1, 2, 3장이 조향자의 고단한 생활 세계의 구체적 세목을 서술하고 있다면 4장은 독서모임에서 받아온 『정음』이라는 책을 매개로 그녀의 생애에 얽힌 내력을 소급한다. 사실 이 한 장으로도 서사의 충동이 차고 넘친다. 자신의 태생부터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끌어준 류정일, 그리고 부모와 같이 원폭 피해자로 원자병으로 고생하고 치매를 앓다 죽은 남편 동준과 파혼과 실패를 거듭하며 자살한 아들의 이야기를 숨 가쁘게 회상하기 때문이다.

3부의 1장은 일인칭 주인공 서술자가 류정일이다. 다른 빨치산 동지인 박동배, 이영섭이 안재석의 서사 속에 포함되고 원폭 피해자인 이동준이 조향자의 서사 안에서 서술되는 양상과 다르게 독립되어 있다. 그만큼 류정일이 여러 내러티브를 연결하는 결절점의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 패전과 더불어 류정일은 오사카 츠루하시를 떠나 시모노세키에서 도항이 여의치 않자 야마구치 조선학교 주변에서 머물다 해가 바뀌면서 향자와 함께 부산으로 귀환한다. 『정음』은 조선학교의 한국어 교재이며 향자와 동준도 이 책을 통하여 정일의 지도하에 한국어 교습을 받는다. 야마구치는 정일과 향자와 동준을 연결하는 처음의 장소이다. 그리고 향자가 정일의 죽은 누이동생의 이름을 받은 탓도 있지만, 그들은 남매 역을 하거나 부부 역을 하며 귀환에 성공하여 수정동에 정착하게 된다.

4부 ‘죽기 전에 해야 할 일’ 1~3장은 2부에 이어서 다시 삼인칭 전지의 조향자 시점으로 돌아온다. 1장에서 ‘장수원’으로 가야 한다는 어지러운 심경에서 들른 국밥집에서 안재석을 만나고 그가 조향자의 집에서 잠을 청하는 사건이 생긴다. 하지만 아직도 그녀는 그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녀는 남편과 아들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트라우마를 지녔고 열일곱 평 아파트를 나와서 장수원으로 가기를 권유당하는 말년의 처지에서 다른 누구를 진지하게 알려고 하는 의지를 갖지 않은 듯하다. 또한 세상의 풍파를 겪으면서 터득한 ‘수동적 능력’이 그녀로 하여 분간하고 구분하는 일을 거부하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하튼 이렇게 안재석은 조향자의 죽은 남편이 기거하던 방에서 잠을 자고 모자를 둔 채 나오게 되며, 이러한 사건은 조향자가 다시 원자폭탄 투하로 폐허가 된 히로시마에서 겨우 벗어나 시모노세키를 거쳐 야마구치에 이르러 그녀를 만난 남편의 신산한 삶을 떠올리는 계기가 된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오래전에 간직한 희미한 빛이었다. 영감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그때도, 꼭 심장 뛰는 소리처럼 들렸다”라는 구절로 끝난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오래전에 간직한 희미한 빛”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조향자에게 아들은 “크고 밝은 별”인 “금성”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남편과 아들의 부재는 그들의 유골을 흘려보낸 그림자의 강과 같은 세월을 남긴다. 이러한 가운데 그녀의 내면에 “오래전에 간직한 희미한 빛”은 결코 아무것도 아닌 빛이 아니다.

해방과 한국전쟁 시기를 훌쩍 뛰어넘어 팬데믹으로 어두운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에 빛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안재석과 조향자가 여러 인물과 어울려 만든 사랑과 믿음은 비가(elegy)로 그치는가, 아니면 새로운 희망의 가능성인가? 이 소설은 이와 같은 마음의 문제를 탐구한다. 그래서 시적인 아름다움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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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드론독서 4

저자:정광모 / 출판사:도서출판 전망

소설가의 독서일기이다. 문학, 인문, 사회, 과학을 넘나들고 가로지르는 다양한 책들을 읽고 난 감상의 글을 엮은 책이다. 어떤 편견이나 도그마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저자의 종횡무진 ‘드론’ 독서법은 근현대 문학과 우리 사회의 다양한 지평을 가늠해 보게 한다. 또한 저자는 오랫동안 독서모임 등을 통하여 책을 읽고 토론하는 사회적 실천에도 관심을 가져왔다. 저자는 디지털 시대라고 하는 오늘날에도 독서야말로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한 인간의 정수를 흠뻑 마실 수 있는 멋진 기회라고 말한다. 그야말로 인생에 있어 멋지고 유용한 체험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독서’라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독서의 길을 떠나고자 하는 이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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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밖에 누군가가

저자:김지현, 오선영외 / 출판사:네시오십분

다섯 명의 여성 작가가 함께 쓴 앤솔로지 소설집. 참여 작가로 상업출판과 독립출판 사이를 오가며 여러 지역에서 활동 중인 다섯 명의 여성 작가를 섭외하였다. 이는 등단 여부 및 활동 지역 등에 의해 글을 발표할 수 있는 지면도 제한적인 기존 문학장의 경계를 허물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앤솔로지 소설집의 테마는 ‘여성, 공포, 공간’이다. 다섯 명의 작가가 함께 목소리를 낼 만한 의미 있는 주제이면서 각자의 개성이 발휘될 수 있는 테마라는 점에서 기획되었다. 『문밖에 누군가가』에서 작가들이 포착하는 공포는 귀신이나 외계의 존재, 혹은 극한의 상황에서 초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주변 어딘가에서 지금 이 순간도 일어날 법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공포의 감각을 더 생생하게 우리 몸에 돋을새김하며, 동시에 그 감각을 느껴야 하는 현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문밖에 누군가가』가 지닌 또 다른 특징은 소설집 속 ‘초대장’에 있다. 하나의 이야기 세계의 문이 닫히면 그 이야기의 작가가 다음 이야기 세계의 문을 넌지시 열어 주는 모습이 연상되도록, 앞에 실린 작품의 작가가 바로 뒤에 실린 작품의 초대장을 썼다. 하나의 책에 그저 글을 같이 싣는다는 의미로만 그치지 않고, 참여 작가들 간에 상호 소통과 교류의 산물로서 초대장이 고안되었다. 또한 초대장은 작품 속으로 독자를 불러들이는 역할도 톡톡히 해낸다. 이야기 바깥에 있던 독자는 작품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며 어느새 자신 또한 이야기 세계 속에 깊게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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